보이는 장애보다 더 무서운 건 안 보이는 장애
둘째 아이(이후 장남이)에겐 ‘사시’가 있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한 중증 장애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경미한(?) 증상에 ‘장애’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까 염려되어 적습니다. ‘비교적 쉬운 암’이라고 알려진 ‘갑상샘 암’은 ‘암도 아니야’, 라고들 흔히 말하는데 본인의 눈물 투병기를 고백했다가 누가 보면 죽을병 걸린 줄 알겠다며 유난 떤다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연예인 모씨가 인터뷰에서 말했죠. 아무리 모두가 별것 아니라고 해도 막상 선고를 받은 이들에겐 ‘암’이라는 두려움은 동일하게 다가온다고.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주변의 시선이 투병 과정을 더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게 했다고요. 세상의 잣대와 상관없이 저에겐 처음이고 낯설었고 두려운 과정이었기에 그대로 씁니다.
크던 작던 ‘장애’를 가진 모든 아이들의 부모들은 그 장애를 받아들이기까지 놀람과 부정, 고통과 수용의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둘째를 키우는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듯, 특히 딸을 키우고 난 아들 엄마의 육아는 신세계였다. 들은 그대로 모든 게 조심스럽고 겁 많던 딸램과 달리, 아무거나 만지고, 툭하면 넘어지고, 떨어지고, 뛰어오다 멈추질 못해 박는 일은 다반사인 장남이가 본인 몸뿐 아니라 살림살이 때려 부수는 일도 수차례였으니 아들은 원래 저런가 보다, 이래서 아들 맘이 목소리만 커지는가 보다 대수롭잖게 지나쳤었다. 세 살 터울로 셋째를 낳고 도우미 아줌니가 오셨는데 함께 지내던 며칠 후, 할 말이 있으시다며 그 말 많은 아줌니가 세상 그런 뜸이 있나 싶게 몇 번이나 망설이시더니 어렵게 입을 떼셨다. “곤쥬 엄마, 내 말 맘 상하게 듣지 마요. 미남이 눈이 조금 다른 거 같아..혹시 알아요? 내가 그동안 지켜봤는데 모르는 거 같더라고. 주제넘게 나서는 거 같아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곤쥬 엄마는 기분 상하게 듣지 않을 거 같아 얘기해요.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으…응…?
그랬나?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그래요? 어머,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난 몰랐네. 한번 볼께요.' 라고 말하고 정말 그런가 싶어 지난 사진첩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런! 누가 봐도 어어…? 할 정도로 미남이는 시선이 일정치가 않았고 때로는 모이고 때로는 벌어져 시선의 끝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모습이 꽤 있었다. 그때만 해도 사시는 보통 눈이 모인 ‘사팔뜨기’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사시라는 말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다만 애가 눈이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미국 병원은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증명되었듯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을 뿐 서민이 피부로 느끼는 의료 시스템이 개판이다. 안 아프면 사는데 지장 없지만 아픈 순간 이곳은 헬. 총 맞아 피 흘리며 ER로 가야 하는 상황이 아닌 담에는 의심되는 질환으로 인해 생판 기록 없는 병원에 새로운 약속을 잡으려면 3개월의 대기 시간은 기본이다. 특히나 안과 같은 특이 질환(?)은 일반 전문의 (family doctor 또는 general pediatric dc) reference(소견서)가 있어야 가능하고 두어 달 대기는 당연한 수순인데 문제는 엄마의 멘탈이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한 팔엔 겨우 두 달이 채 못된 막둥이를 끌어안고 한 팔에 뺏긴 엄마 사랑이 고파서 울다 지쳐 잠든 미남이 손을 잡고 매일 밤 자책했다. 왜 여태 몰랐지, 그러고 보니 유독 잘 넘어지고 툭하면 벽에 박는데 어떻게 몰랐지, 난 엄마 자격이 없나,,자신을 학대하며 스스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2 부정
내가 사시 박사가 될 줄이야…?(일반인 기준입니다. 의사한테 들은 쉬운 설명으로 대신할 뿐, 전문 용어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흔히 사시라고 하면 눈동자가 안쪽으로 모이는 사팔뜨기를 떠올리지만 그건 사시의 여러 패턴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사팔뜨기는 눈이 안쪽으로 모이는 내사시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흔치 않지만 눈동자가 바깥으로 벌어지는 외사시가 있다. 미남이는 특이하게도 정면 시선은 멀쩡한데 시선이 위쪽으로 향할 때, 어느 순간 눈이 양쪽으로 벌어지는 V-pattern 외사시다.
일반적으로 눈동자는 이를 당기고 있는 동서남북의 주변 근육에 의해 움직이는데 그 중 하나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tight 할 경우 이런 패턴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긴장된 근육을 느슨하게 늦추는 수술로 비교적 쉽게 교정이 가능하니 걱정하지 말라며 수술 날짜를 잡았다.
두 돌이 갓 지난 아이를 전신 마취하는 일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런 수술은 만 3세 이전에 교정 효과가 크다니 가급적 빨리 하는 게 좋기도 했고 그때만 해도 수술하면 금방 돌아오겠지, 흉터 지우는 수술쯤이라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나 수술 이후, 아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눈동자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6개월을, 또 이후 1년을 기다렸지만 아이의 시선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 후, ‘Durane Syndrom’ (비정상 패턴)이라는 새로운 진단을 받았다.
이 아이의 주변 눈 근육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복잡하게 꼬여있어 어떤 부분이 비정상인지 찾아내기가 불가할뿐더러 잘못 건드렸다가는 정면 시선마저 잘못될 수 있으니, 사는데 큰 지장(기능적인) 없으면 이대로 살면서 다른 수술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사실상 해줄 것이 없으니 이 상태로 지켜보자는 의견이었다.
엥?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럼 영원히 이 눈으로 살아야 한다고? 남자 아이라 운동도 하게 될 텐데 혹여 농구나 야구 등 시선이 위로 가야 하는 경우 못 볼 수 있는 건가요? 저절로 나아지는 경우도 있나요? 혹은 시력이 나빠지게 되는 건가요? 수술 외 교정하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we are not sure, and we’ll keep it up.”
뿐이었다.
마침, 최순실 사건이 터져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그때, 우연히 관련 기사를 읽다가 어떤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어어…? 삼성전자 장충기 사장.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421&aid=0002772724 (포털 사이트에 해당 인물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정보 제공으로 실명과 링크를 첨부합니다. 특정인에 대한 비하나 모욕의 의도가 전혀 없으나 개인 정보 노출로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당연 그의 시선이었다. 혹여나 내가 잘못 봤나 싶어 기사 내용을 읽기도 전에 댓글부터 확인했는데 첫 번째 댓글, “이 ㅅㄲ 사팔뜨기네.” 이후로는 지 욕심에 눈이 돌았다는 둥, 벌을 받은 거라는 둥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조롱과 모욕으로 느껴지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댓글들이 나에겐 미남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알게 모르게 그에게 쏟아질 편견과 조롱으로 보였다.
이후로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했다. 5%의 가능성(수치상 5%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봄)을 기대하며 다시 전신마취를 하고 전체 눈 근육을 열어 의심되는 오류를 확인했지만 역시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국에 가서 재검도 했지만 ‘미국 병원에서의 소견과 동일합니다. 일단은 지켜보시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네요’라고 했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갖는 어려움에 대해 혹여 내가 몬가 잘못한 게 아닐까라는 자책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엄마가 있을까?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시도는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가능한 모든 곳을 들쑤시고 다니던 그때, 종종 이런 위로의 말을 들었다
“괜찮을 거야. 사실 니가 말 안 하면 하나도 티 안나. 나도 진짜 몰랐어.”
그랬다. 사람들은 잘 몰랐다.
아이가 커 갈수록 종종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상담 중에 부모가 인지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따금 알면서 모른척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정말 잘 몰랐으니 ‘티가 덜 나는 건’ 사실이었다.
생각해본다.
내가 걱정하는 건 아이가 이것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지 않을까. 혹여나 더 악화되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였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혹여 내 아이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이걸로 놀림을 당하거나 자격지심을 갖게 되면 어쩌나 라는 시선이 두려운 게 아니었던가.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 내 발가락은 손가락처럼 길어서 웬만하면 양말을 벗지 않고 나의 왼쪽 가슴은 오른쪽에 비해 빈약해 특히나 옷이 얇아지는 여름에는 티가 덜 나게 늘 신경이 쓰인다. 그뿐일까. 교회에서는 조곤조곤 타이르고 달래는 집사님인 내가 집에만 오면 소리를 지르는 괴물로 변하는 건 우리 구역 식구들 모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숨기고 감추고 가족 안에서만 쉬쉬하는 수많은 포장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니 몸이든 마음이든 이 순간도 병든 무언가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야 말로 ‘티 나는’ 장애인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티 안 나는’ 장애인들이 아닐까.
장남이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종종 말해왔다. 누군가는 한쪽 손가락이 짧고 누군가는 말이 어눌하고 또 누군가는 걸음이 유독 느리고 누군가는 주먹만 한 혹이 있기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가 다 다르게 지음 받았어. 어떤 건 더 잘하고 어떤 건 부족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이야.
그나마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혹은, 크면서 점점 나아질거야,
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감사하지만
장남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거나 나아지지 않는 것이 '불행'이 아닌 것처럼
겉으로 보여지는 상태가 양호하거나 나아진다고 해서 '다행'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 아님에도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길 원한다.
때로 부족함은 좁아터진 우리의 마음을 넓게 만들어주는 축복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평생을 싸워오며 극복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지 모를 과정을 그저 ‘저 ㅅㄲ 사팔뜨기네’라고 말하며 우월하다고 느끼는 병든 마음을 마주했을 때 나 또한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이 열등감이 아닌 긍휼함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감추기보다 드러내는 순간, 장애는 더 이상 부족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다름’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면 좋겠다.
정말 슬프고 아픈 건 부족함을 숨기고 티 나지 않게 포장하느라 곪아버린 마음의 상처니까.
장남이는 올해 10월, 만 10살을 앞두고 있다
한겨울에도 나시에 반바지를 입고 종일 뛰어다니는 날쌘돌이 장남이는 야구광이다.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플라이볼을 보지 못할까 했던 염려는, 크면서 고개를 돌리는 법을 알게 되고 본인이 알아서 적응 할 것이라는 의사쌤 말처럼 바지런하고 빠른 발로 붙박이 1번 타자가 되면서 자연스게 접어두게 되었다.
여전히 장남이의 시선은 일정치가 않을 때가 있고 종종 눈에 띄게 흔들리며 다른 곳을 향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모두 그 일을 대수롭잖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전히 맘 졸이는 엄마에게 아이들의 의연함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