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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Apr 27. 2022

계절을 알리는 냄새

얼마 전 종영한 싱어게인 2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초야에 묻혀 있던 무명 가수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 건 마치 해당 곡에 대한 느낌을 오감으로 표현하는 듯한 김이사 작사가의 심사평이었다.


그녀는 독특한 음색이 눈에 띄는 이주혁 가수님에게 ‘후각을 자극하는 가수’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말했다. 겨울이 오면 온도가 아닌 바람 냄새를 맡고 계절의 변화를 눈치챌 때가 있는데 그런 냄새가 나는 가수라고. 계절의 변화를 냄새로 알아챈다…그 표현에서 계절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계절의 냄새는 유학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는 가을학기 냄새다.

여름 내 캠퍼스에 무성하게 자란 잔디를 개강을 앞두고 싹 깎고 나면 막 흩어지는 생생한 풀향기가 며칠 동안 캠퍼스 안에 머문다. 새벽 이슬이 더해진 풀향기는 더욱 짙어져 아침에 기숙사에서 나오다 보면 그 쨍한 향에 취해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아… 가을이구나, 새 학기가 시작되는구나’ 했었다.

어학연수가 끝나고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끝나고 학교를 옮기고 주니어, 시니어의 해를 맞이하는 동안 캠퍼스는 달라졌고 친구들도 달라졌고 내 상황과 마음가짐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가을 학기를 시작하는 그 생생한 풀향기는 늘 한결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캠퍼스에서 맡을 일이 없는 그 풀향기를 어느 곳에서든 문득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캠퍼스의 풍경이, 아침저녁으로 선뜻한 가을 학기 바람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학생들의 활기찬 발걸음이, 구석구석 벤치마다 짱박힌 씨씨들의 속삭임이 그려진다.

그것이 김이사 작사가가 언급한 ‘계절에 냄새’라는 표현에 떠오른 나의 기억이다.   




모든 것이 소생하는 봄,

생명이 피어나는 순간이 실시간 눈으로 확인되는 봄에는 

풀향기와 꽃향기를 맡기도 전에 오색 찬란한 시각적인 황홀함에 취하기 때문일까.

부쩍 따뜻해진 날씨로 봄이 가기도 전에 여름이 오는가 싶어 아..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봄날이 가버렸구나 싶던 오늘,


여느 때처럼 저녁 시간 막둥이와 놀이터에 나왔는데

잠시 쉬는 등나무 그늘 아래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익숙한 향이 코를 자극한다.

마치 초딩 동창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너무나 오랜만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난 향기.

고개를 들어보니 등꽃(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보라색 등꽃은 모양도 향도 하얀색 아카시아꽃과 꼭 닮았다.


문득 떠오른 향의 기억.

어려서 할머니 집 대문 옆 작은 쪽문을 나서면 아카시아 꽃이 잔뜩 피어 있는 샛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던 시골길은 기억 속에 장면만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인데 그 향기만큼은 코를 찌를 듯 강렬하게 남아 있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아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오올 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쌩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잠시 눈을 감고 나직이 읊조리며 가을 학기 냄새를 맡듯 가만히 누워 숨을 들이마시고 또 마셔본다.

아.. 봄이다. 

잊고 있던 봄의 향기를 만끽하며

나에게도 분명 있었던 찬란하게 아름답던 봄날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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