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공간
고백하자면 비행 공포증
난 어려서부터 비행이 무서웠다.
첫 해외여행을 앞둔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이었다. 삼 남매 중 늘 시끄럽고 부산스러웠던 둘째답게 그날도 잔뜩 설쳐대며 촐랑대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잘조잘거리며 즐겁게 출발했는데 공항이 보이던 시점, 내가 와락 택시 안에 구토를 했다. 당황한 엄마빠가 급히 치우느라 어수선한 와중에도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울렁거렸던 느낌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감스러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후로 몇십 년간 결코 적지 않은 비행을 경험했으니 이제는 적응할 만도 되었건만 여전히 마의 11분이라는, 이륙 3분과 착륙 8분의 시간 동안엔 숨을 고르게 쉬기 어려울 정도로 순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나 이륙 시 갑자기 엔진 소리가 굉음을 내며 내달리기 시작할 때는 몸이 뒤로 붙는 물리적인 힘과 더해져 그 두려움은 극강의 공포가 되곤 했다. 아이들과 탈 때는 나로 인해 아이들까지 불안해할까 봐 최대한 평점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봤지만 호흡이 가빠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으니 아이들도 커가면서 당연스레 이착륙 시에는 엄마한테 말을 걸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난은 포장할 수 있으며 기침은 일부 삼킬 수 있고 하물며 사랑조차도 전략적 후퇴라는 말이 있듯 필요에 따라 숨길 수 있지만, 공포만큼은 온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 여겨진다.
무서워도 창가는 진리
예약된 자리는 가장 끝자리였다. 이미 만석인 비행기에는 캐리어를 넣을 공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앞칸까지 넘어 넘어가서야 겨우 두 캐리어를 욱여넣을 수 있었다. 이착륙은 두렵지만 그럼에도 밖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를 좋아한다. 엄마가 된 후로는 늘 아이들에게 밀려 복도나 중간 자리가 내 차지였지만 이번에는 딸램의 양보로 오랜만에 창가에 앉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자리에 앉기까지 겪은 일이 휘리릭 스쳐가며 이 여행에 내가 생각지 못한 일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였을까. 매번 눈감고 심호흡하느라 보지 못했던 출국 장면을 오늘만큼은 용기를 내 지켜보고 싶었다. 안전벨트 경고 등 들어오고 기체가 움직이고 회전하더니 … 공포의 굉음과 함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몸이 뒤로 젖혀지며 바닥을 긁던 바퀴가 붕 뜬다. 공중에 뜸과 동시에 기체가 균형을 잃은 듯 좌우로 기우는 건 마치 발이 닿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아 가장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굉음이 잦아들고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쿵쾅거리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이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모습니다. 어떤 카메라로도 담을 수 없는 구름 위에서 구름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초월적 느낌, 찰나의 신선놀음을 즐겨본다.
New York JFK에서 Rome Fiumicino공항까지는 대략 8시간, 저녁 9시쯤 출발했으니까 8시간을 날아가 로마 공항에 도착하면 출발지 시간으로 다음날 오전 5시, 6시간의 시차를 고려하면 오전 11시가 된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 계획을 세워야 할 시간이지만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난 과감히 잠을 택한다. 구름 위에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바라보며 이 비현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여행이 되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