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시간보다 더 길었던 출발에서 출국까지
여행의 시작은 짐 싸기부터.
여행은 떠나는 순간이 아닌,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목적지가 익숙한 곳이면 그곳을 추억하는 어느 순간을 떠올리며, 처음 가보는 곳이라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발을 내딛기 전까지 준비하는 모든 순간은 형형색색 채워질 아름다운 장면의 밑그림이 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이상과 현실의 명확한 차이처럼 앞서 언급한 여러 정황들로 인해 그 설렘의 준비 기간을 갖지 못했다. 일상의 삶이 워낙 바쁘기도 했지만 그보다 지난 학기에 자격증 시험을 위한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다. 학교도 다니고 있었고 종종 일도 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무리인 듯했지만 혹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보자는 각오로 봄 학기가 끝나는 주에 시험을 신청했다. 아이들의 학기와도 딱 시기가 겹쳐서 같이 방학이 시작되니 시험 끝나고 홀가분하게 가면 좋겠네~ 싶어 시험 다음날로 출국 날짜를 잡았다. 계획 잼병이 세운 계획치고는 어쩜 시기도 딱이라 대만족이었으나, 그건 결국 여행 준비도 시험 준비도 머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최악의 계획이었다.
내가 가진 멀티 태스킹 능력은 이미 일상의 삶에서 탈탈 소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험을 앞둔 즈음에는 그것만 해내기도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끝내고 나서야 컴터를 켜고 두어 달 전 티켓팅 이후 손 놓고 있던 르네상스 책과 숙소의 위치를 검색했다. 슬슬 설렘과 기대가 시작되려는 차, 낭만 따위 개나 줘버린 현실의 아줌마에게는 치러야 할 과업이 있었으니 3주간 아들들과 아빠만 남겨놓고 집을 비우는 것에 대비한 냉장고 정리였다. 냉장고 대청소는 해마다 여름 방학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데 올해는 당연히(?) 못했다. 보나마나 안 먹을 음식을 후다닥 미리 버리고 남은 건 최대한 찾기 쉽게 재배치하고 은밀한 곳에서 상해가던 아이들을 싹 치웠다. 드디어 출발일, 이제 벼락치기 짐 싸기 신공을 발휘할 시간이다. J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일정이 정해진 순간, 냉장고부터 정리하고 계절별로 나와 아이들의 옷을 챙기고 가족들 선물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어릴 땐 공항에서 먹을 이유식, 유모차와 카시트까지, 최대한 차질 없이 준비하느라 족히 일주일은 걸렸고 출발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한 체크리스트까지 써 둬야 비로소 짐 싸기가 끝났다. 아이들이 크면서 바리바리 싸지 않아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가니 타고난 성향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벼락치기 후다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지만 당일 짐 싸기라니… 이번엔 좀 심했다.
계획은 계획일 뿐
화보를 찍으러 가는 건 아니지만 난생처음 딸램과 둘만의 여행에 평소와 다른 스탈도 도전해 보고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아래 인생샷도 남기고 싶었지만 그건 그때의 니생각이고…반팔, 반바지, 나시, 셔츠, 잠옷, 운동화, 슬리퍼, 세면도구 손에 잡히는 대로 쓸어 담다시피 캐리어를 채웠다. 요즈음엔 부치는 짐은 무게와 상관없이 추가 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에 공짜인 캐리어가 필수이기도 하지만(저가 항공인 경우 캐리어에도 별도 요금이 부과되기도 함) 공항에서 체카웃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가급적 짐을 부치지 않는 게 편했다. 도착해서도 도시 간 이동은 기차 여행이 될 텐데 역에서 숙소까지 거리도 어찌 될지 모르고 (미리 못 알아봄 ㅠㅠ) 체크인 시간에 따라 짐을 갖고 다녀야 할 수도 있어서 각자 캐리어 한 개를 상한선으로 정했다. 그렇게 되니 무엇을 쌀지 고민할 여지가 없어졌다. 하긴 그 와중에도 아빠를 꼭 닮은 계획주의자인 딸은 일주일 전부터 나랑 똑같은 사이즈의 가방을 펼쳐놓고 이걸 담을까 저걸 담을까 이걸 뺄까 저걸 뺄까 수없이 푸닥거리긴 했다.
다다다 지퍼를 채움과 동시에 차가 출발했다. JFK공항까지 한 시간 반이지만, 평일 저녁이니 교통 체증이 조금 있을 것을 감안해 출발 시간보다 3시간 정도 일찍 출발했다. 이제 가는구나, 설렘보다 앞선 안도감? 이 금쪽같은 시간에 알아봐야 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 이 여행의 발을 떼는 설렘을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망했네 망했어
한 시간쯤 지나, 슬슬 온라인 체크인도 하고 점검 사항 등을 읽어보는데 평소보다 유독 체증이 심한 듯했다. 사고가 났나? 한참을 서 있다가도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쭉쭉 가니까 금방 풀리겠지? 했는데 2시간, 2시간 반, 3시간… 도착 예정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난다. 이미 보딩 시간에 도착하긴 글렀고 이륙 시간까지도 간당간당하다. 아무리 늦어도 비행기를 놓쳐본 적은 없기에 어떻게든 되겠지 막연히 체증이 뚫리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다음 편을 알아봐야 할 때였다. 분주히 전화를 돌려보니 마침 두 시간 후 비행기가 있었고 변경하는데 추가 비용도 없어 바로 예약하려는데! 전화가 끊겨버렸다ㅠㅠ. 겨우겨우 다시 연결이 되었는데.. 원래 내가 예약했던 항공사는 Air France였는데 중간에 비행 스케줄 변경으로 연동이 되어있는 Delta로 자동 전환이 되었었다. 지금 변경이 가능한 항공편은 Delta인데 나는 Delta 구매 고객이 아니니 해당이 안 되고 Air France에 연락해서 가능한 항공편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OMG (Oh My Goddamnsituation!)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짧은 순간에 오만 생각이 스쳐갔다.
이 극성수기에 당장 새 티켓을 구매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그럼 여행이 취소된 우리의 여름은 어찌 되는 것이며 이런 기회는 다시 있을까, 또 한두 푼이 아닌 예약한 숙소는 환불이 가능한 건가 등등…
더도 덜고 말고 기적
그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가고, 보딩 시간인 6시가 임박했을 때 우리는 아직도 1시간 거리의 트래픽에 갇혀 있었다. (원래 비행기는 7시 정각, 이미 2시간 전에 온타임 출발이라는 메시지가 온 터였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전화도 잘 안 터지는 고속도로 상에서 Air France에 전화해 언제 연결될지 모르는 통화음을 한없이 기다리던 중,
갑자기 메시지가 왔다.
이미 사람들은 보딩 안내 방송에 따라 줄을 서 있을 시간이었다.
“출발 시간 8시 반, 보딩 7시 반으로 연기”
?!?!?!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를 붙들고 난리를 치는 동안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이 이렇게 한순간에 풀려버리니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예수님 이후로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우리가 '다행이네, 새뻑이네' 여겼던 일상의 ‘운’은 사실상 그분이 행하신 기적이었다는 걸,
(물론 이 여행을 못 간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건 아니지만)
그리고 그 기적이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경험한 순간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건 6시 반.
체크인을 미리 했으니 보딩으로 직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어느 시대의 생각인지.
보안 점검(Security Check) 줄이 말도 안 되게 길다. 검색대 입구 앞에서 인사하고 포옹하고 갖은 이별 세레머니 다 한 후 들어오면 쭉쭉 검색대로 가서 신발 벗고 여행자 모드 바꿔 끼는 게 아니었던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최소한 서너 겹은 겹겹이 서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보안 요원의 눈을 피해 새치기를 하는 인간들까지... 코로나 이후 보복 관광이라는 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난리통의 검색대를 지나 게이트 앞에 서니 정확히 7:35 보딩 타임이었다.
일부러 맞추려고 해도 맞출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타이밍의 이어짐?
우연에 우연이 더해진 우연으로 시작된
나와 딸과 그분이 동행하시는 여행이라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드디어 출발해야 출발인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