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EBS 세계의 명화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방영하는 것을 보고는 채널고정을 했다. 예전에 그 영화를 몰입해서 보던 기억을 떠올렸다. 게다가 영화의 뒷부분을 보며 충격에 사로잡혔다. 스토리상의 논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피아노 배틀을 하는 장면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던 영화다.
대만 여행은 주로 인도나 파리 여행의 경유지로 잠깐 들르는 정도여서 그곳만을 여행하자고 여행 정보를 막 찾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여행 후의 마무리 단계에 짧게 머무는 의미였다. 비행기 티켓은 직항보다는 경유가 보다 저렴하고, 이왕 들르는 곳이니 2박 3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자 머물렀던 것이다.
주로 대만 여행에서는 단수이에 일몰을 보러 들르곤 했는데, 나중에야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곳이 거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영화에 나온 진리대학교, 담강고등학교 등의 학교가 일몰 보러 가던 길에 스쳐 지나간 학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를 알고 들렀으면 그 감동이 몇만 배는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꽤나 무서워한다. 섬뜩하다. 외국영화 <뷰티플 마인드>를 보고도 그랬다.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삶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데 몰입해서 보다가 마지막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보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인지, 내가 만들어낸 세상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 말이다. 한동안 그 여운이 나를 괴롭혔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문득 고흐에 대해 언급한 책들이 떠오른다.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세상이 다른이에게는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 부분이다. 저자 사노 요코는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책에서 20년쯤 전에 자율신경 실조증이라고 의사가 이름 붙인 증상에 시달렸다는 것을 고백한다. 옛날 같았으면 귀신 들렸다거나 미쳤다는 말을 들었을 거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근시인데도 멀리 있는 물체의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 가을 산의 수많은 단풍잎이 한 장 한 장 보이면 정말 피로하다. 피로하지만 아름답다. 약을 처방해주는 의사는 경험한 적도 없으리라. 노송나무가 있었다. 그 노송나무를 봤을 때 '앗, 고흐는 노송나무의 굴곡을 강조하여 그린 게 아니라 자기 눈에 그렇게 보였던 거다'라고 깨달았다. 노송나무가 내 눈에 고흐가 그린 노송나무와 똑같이 보였다.
『문제가 있습니다』 184쪽
『지금 이 순간 프랑스』에 보면 '미스트랄'이라는 자연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곳에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고흐가 이상한 거라고 판단해버릴 법하다.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하늘이 뱅뱅 도는 느낌이 들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고흐가 미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거라고 하는데…….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이곳에 오면 그런 자연 현상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후자의 입장이 궁금한데 그 현상을 '미스트랄'이라고 들었어요. 어떤 것이 맞는 건가요?"
"맞아요. 미스트랄이에요. 미스트랄은 온도가 높고 건조한 바람이죠. 전체적으로 부는 바람이 아니라 좁은 지역에서 불어요. 반 고흐가 미쳐서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미스트랄 때문이 맞아요."
"나뭇가지나 흙이 바람에 휩쓸리면 보이기도 하고, 주로 느끼는 거죠. 미스트랄이 불면 머리와 옷이 엉망이 되어 버려요. 누구나 이 바람을 맞으면 신경질이 나고 말죠."
『지금 이 순간 프랑스』 277쪽
과연 어디까지가 고흐만이 본 세상이고, 어떤 부분은 누구나 그곳에 간다면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을까. 고흐뿐만 아니라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세상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하는 말을 100% 믿을 수 없는 것과 내가 하는 말도 누군가에게 100%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언젠가 세계테마기행을 보다가 모로코에서 나무 위 가지에 자리 잡고 있는 염소들을 보았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마리의 염소가 나무 한 그루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주렁주렁 앉아있는 것일까. 세상 일이 그렇다. 화면으로 보아도 어쩌면 조작되었는가 의심되고, 직접 가보아도 나의 고정관념을 깨기 힘든 경우도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책을 물어보면 그 답변은 제각각이다. 비슷할 듯한 느낌에 질문해보아도 의외로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곤 한다. 같은 곳을 여행해도 그곳에 대한 감상이 천차만별이다. '내 마음이 그 마음'이라는 건 사실 희망사항일 뿐, 어떤 때에 생각해보면 정말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오늘은 문득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또한 제각각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렇게도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그 와중에 교차점을 찾을 수 있어서 무척이나 고맙다. 오늘만큼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