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행의 기억 속에서 제일 먼저 빨강을 꺼내 들었고, 그다음엔 노랑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다음에는 파랑을 이야기해야지!'하고 말이다. 그동안 아껴두었다가 이번에 '파랑'을 꺼내 든다. 색감이 부족한 나는 그냥 '빨강, 노랑, 파랑'이다. 그렇게 단순한 순서로 오늘은 파랑을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다. 오늘은 여행에서 만난 파랑을 떠올리며 차곡차곡 추억 쌓기를 해본다.
'파란색'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영화 <김종욱 찾기>에도 나오는 인도의 블루시티, 조드푸르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 그곳은 나중에 인도 여행을 다시 간다면 가보겠다며 아껴둔 곳이다. 꼭 가보고 싶다기보다는 '다음에 가면 좋을 곳'으로 남겨두는 곳이랄까. 이렇게 말하니까 핑계 같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가도 좋을 법한 곳을 하나쯤은 꼭 남겨둔다. 다음에 거기에 가겠다는 이유로 다시 짐을 꾸릴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여행지에서 그곳을 샅샅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거기에 평생 다시는 안 간다는 소리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한 군데 정도는 그냥 마음에 품어두고 다음을 기약한다.
직접 보았던 파란색을 떠올린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인도 남부 고아 여행을 하던 때였다. 작은 갤러리에 그림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작품들이 죄다 푸른색이었다. 작가가 파란색 물감만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어서 한참을 감상에 젖어있던 때가 떠오른다. 어쩌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작품과 조우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감동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여행 중에 만난 파란색 중 인상적인 것은 주로 미술 작품이었다.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만난 마티즈의 작품이나 이브 클랭의 블루도 색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사실 퐁피두 센터에서 작품보다 더 시선을 끈 것은 단체로 학습 나온 어린이들이었으니….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무언가 적어나가고 있는 그 모습들이 기특하고 부러워서 한참 쳐다보았다.
내가 웬만해서 물건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편인데, 인도에서 만난 파란색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흔히들 '물건은 살까 말까 고민되면 사지 말고, 여행은 갈까 말까 고민되면 일단 가라'라는 말을 하지만, 물건도 물건 나름이다. 여차하다가 기회를 놓친다. 그 당시 인도 마이소르에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사지 않았던 그 숄이 계속 떠오르며 뒤늦게 엄청 후회하고 있었다. 이미 그곳은 지나간 지 한참 되어서 다시 되돌아가기엔 너무도 늦은 상태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정말 그 당시에는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동일한 색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 번째라도 마음에 드는 파란색을 만나 입지도 않을 인도 전통 의상 사리를 구입하고 만 것이다. 그때는 그야말로 충동구매를 하고 말았다. 인도 의상 사리는 그냥 천 한 장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잘 둘둘 말아서 입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일단 마음에 드니 사긴 샀는데 그 천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결국 뜻이 있으니 길이 보였던 것일까. 바르칼라 해변에 갔을 때 양장점이 눈앞에 떡 하고 나타났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일단 물어나 보자고 천을 가지고 갔더니, 옷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이 입는 사리 천 한 장으로 치마 둘, 바지 하나, 셔츠 하나, 그렇게 총 네 벌을 만들게 되었고, 여행 내내 실컷 입고 다니며 푸른색을 내 마음에 담은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글을 쓰면서도 단어를 혼동하며 썼다. 파랑, 파란색, 푸른색, 블루…. 하지만 그게 다다. 얼마 전 알게 된 피콕블루, 아콰마린, 트루블루 같은 생소한 이름도, 색상표에서 본 갖가지 파란색 계열 색상도 모두 각각의 개성을 담고 '파란색'이라는 이름으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문득 내가 파란색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너무 늦은 깨달음 같은 느낌에 혹시 지금껏 내 마음을 모르고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 있는지 곰곰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