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책

by 호접몽


요즘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니까 '여행 왔다 치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창하거나 무겁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상상 속으로 들어간다. 여행 가서 호기심을 채워가며 힘차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약간 지친 그 무렵이라고 할까. 그다음에 필요한 휴식 시간 정도라고 하면 되겠다. 신기한 마음으로 열심히 여행지에서 구경 다니다가 어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쉬고 싶은 그 무렵 말이다.



그때가 되면 사실 돌아다니는 것도 좀 버겁다. 어디 앉아서 쉬고 싶다. 그냥 숙소로 가서 뒹굴뒹굴 책이나 봤으면 딱 좋겠다. 여행지에서 텔레비전 틀고 채널 돌리며 멍 때리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지금껏 여행하면서 읽은 책은 기억나도 여행지에서 텔레비전 보았던 것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좀 더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내 곁에 책 한 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때는 여행 전에 지니고 갈 책을 고르느라 고민을 많이 했다. 이미 읽은 책 중에 또 읽을 책을 가져갈지, 아직 안 읽은 책이지만 가서 읽을지, 안 그래도 짐이 많은데 책까지 가져가려니 고민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책을 가져가는 건 파리 가던 길에 시작부터 기분이 처져서 다시는 안 하기로 결심했다. 너무 우울하고 무거운 책인데, 그래도 가지고 간 책이니 아까워서 끝까지 읽으려다가 여행 기분을 다운시켜서 결국 독서를 중도 포기한 것이다.



그다음 여행에는 가벼운 책을 선택해서 가져갔는데, 너무 가벼운 책이어서 금방 다 읽어버렸다. 어찌나 금세 끝나버리는지 아쉬웠다. 그렇다고 여행 내내 소지하고 곱씹으며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입맛만 버린 느낌이랄까. 다른 책을 강렬히 그리워했지만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었다. 책을 가져왔다는 누군가에게 겨우 빌려서 읽기는 했지만, 책이 내 취향이 아니어서 살짝 아쉬웠다. 그럴 거면 한 권 챙겨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여행에서 책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로 했다. 그냥 책 읽을 시간에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나중에 그곳에 대한 기억 하나라도 더 남기는 것이 나으니, 책 읽는 것은 집에 가서나 하자고 생각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이 그렇다.



그런데 지금은 집이다. 집에는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이 있으니 여행지에 왔다고 치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그러니까 가지고 간 책은 이미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서 아쉬운데, "여기가 서재다. 마음대로 읽어라!"라고 쫙 펼쳐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책장에 꽂혀있는 책 중에서 몇 권 뽑아서 쌓아놓고 읽어도 되겠다. 마음껏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챙겨 먹고, 배고프면 밥도 먹으면서 책을 읽어도 된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막 즐겁고 그렇다.



알아서 셀프로 챙겨 먹으라는데 누가 밥도 차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살짝 욕심부리는 것일 테다.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고, 그냥 취사 가능한 숙소에 왔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한 끼 해 먹기로 한다. 비 내리는 날에는 아무리 여행 왔다고 해도 괜히 어디 돌아다니기에는 귀찮기도 하니 하루쯤 숙소에서 쉬엄쉬엄 보낸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 그친 날씨에는 근처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다시 숙소에 와서 책을 꺼내 드는 것이다. 오늘은 그냥 그렇게 이 책 저 책 펼쳐 들다가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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