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맛의 기억

by 호접몽


예전에 텔레비전 <정글의 법칙>에 보면 특식처럼 얼큰한 국물을 먹을 수 있도록 라면 스프를 제공해 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 무렵이면 배경음악으로 "빨간~ 맛~ 궁금해 허니~~~"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음악을 안 들은 데다가 노래를 그렇게 접하고 보니,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알았던 것이다. 그 노래 가사의 '빨간 맛'은 '매운맛'이라고 말이다. 나중에 전곡의 가사를 들은 후에 어찌나 웃었던지, 사람은 역시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동물인가 보다. 그냥 사탕 이야기라는 것을 한참 후에나 알고 말았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알게 된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한동안 멍~하니 실실 웃었다. 나에겐 충격적인 날이었다.



오늘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궁금했던 빨간 맛을 떠올리기로 한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빨간 맛'이라 하면 고춧가루 팍팍 들어간 매운맛 되시겠다. 일단 눈으로 먹어보자면 보는 것만으로도 '나 쫌 매움'이라고 써 붙여놓은 듯하다. 한입 넣으면 매워서 손으로 부채질해가며 물 벌컥벌컥 마시게 하는 정신을 쏙 빼놓는 맛이다. 나에게 매운맛은 스트레스 해소용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나는 본능적으로 매운맛을 찾았다. 2주간 비빔면만 해 먹으며 살았던 적도 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짬뽕으로 마음을 달랜 적도 있다. 힐링푸드다. 요즘은 떡볶이를 해 먹으며 '세상은 그래도 살만해'라고 위안을 얻는다.



여행 중에 만난 빨간 음식 중에 내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들을 세 가지만 떠올려보자니 과일부터 떠오른다. 사실 똠얌꿍 같은 음식도 얼핏 떠올랐지만 이게 빨간색이었던가, 갈색에 가까운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느낌이어서 그냥 '빨간색이다'라고 기억할 수 있는 그때 그 과일 세 가지를 언급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것을 확 뒤바꿔놓은 빨간색이 있었으니 바로 '빨간 바나나'였다. 살다 보니 빨간 수박 말고 노란 수박도 있고 뭐 고정관념을 깨는 수많은 일들이 많아서 지금은 시큰둥하지만, 그때에는 난생처음 빨간 바나나를 만난 것이다. 바나나 껍질은 당연히 노란색인 줄로만 알았던 그때, 남인도 여행을 하다가 처음으로 빨간 바나나를 보았다. 겉이 빨간 바나나의 속은 어떨까 무지 궁금했다. 엄청 기대를 하고 먹어보았는데 역시나 노란 껍질의 바나나와 똑같이 생긴 알맹이에 같은 맛이다. 앗, 아직 그 맛을 안 본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하지 말 걸 그랬나?



그다음으로는 중국에서 먹었던 여지가 떠오른다. '리치'라고 알려진 그것 말이다. 중국집에서 후식으로 한 개 나오거나 캔으로 접하기도 하는 과일 '리치'는 현지에서 먹으면 그 맛을 생각하면 안 된다. 중국 여행할 때에 그 여지를 송이째 팔고 있었다. 나뭇잎을 통째로 뜯어먹는 기린이 된 느낌이었다. 한 송이씩 집어 들고 과일삼매경에 빠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가지째 부여잡고 하나씩 쟁취해가는 여지의 맛은 상상초월이다. 그래서 양귀비가 여지를 그렇게 즐겨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석류도 생각난다. 예전에는 석류가 약간 시큼한 과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석류의 재발견이었다. 이렇게 달콤하고 색깔도 붉고 감동적인 과일이었다니 그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앉은자리에서 허겁지겁 일단 다 먹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석류는 신 과일이 아니다. 엄청 달고 맛있는 과일이다. 그때 그 기억으로 석류에 대한 고정관념은 깨뜨렸다.



인생도 그렇듯 맛 또한 경험하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다. 언젠가 그렇게 코로나가 사라지고 나면 억눌렸던 우리들은 여행도 하고 낯선 세계를 탐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를 위해 지금은 기억의 조각을 모아두는 작업을 해야겠다. 오늘 점심은 비빔면에 삶은 계란 하나 올려서 먹어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행과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