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로 무엇을 쓰냐고 질문을 하신다면, 나는 대중없다고 답하겠다. 조주선사가 말한 '뜰앞에 잣나무' 비슷하다고 하면 될까. 손에 집히는 대로 쓰는 습관이 예전부터 있었던지라, 여기저기에서 온 책갈피는 물론이고 영수증, 휴지, 때로는 돈도 끼워놓고 잊어버린다. 신용카드도 넣어놨다가 한참을 찾은 적도 있었으니, 정말 위험한 습관이다. 신용카드는 특히 줄 긋기 편리해서 강의 들을 때 사용하기에 좋았다. 아, 혹시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책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기 바란다. 지금은 돈이나 신용카드는 지갑에만 잘 모셔두니 말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왜 나오냐면, 요즘 내가 하루에 한 번은 오래전 책을 꺼내들기 때문이다. 예전 책갈피도 발견했지만, 아무래도 그 책갈피는 그 책과 함께 있어야 덜 외로울 것 같아서 다시 끼워두곤 했다. 그리고 주로 마른 나뭇잎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그런 건지 아닌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주 짧은 기간, 나에게도 그런 취미가 있긴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감상할 시는 순전히 그 나뭇잎에 꽂혀 있던 부분에 있던 시라는 것을 밝히면서 시 감상을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상ㆍ본명은 김해경. 1910~1937.
서울출생. 1929년 경성공고 건축과 졸업.
1931년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
그는 처음부터 전통적 문학과는 거리가 먼 시를 발표하여 시단에 충격을 던졌다.
우리 나라 최초로 시도된 의식 세계에 대한 내시적 추구였다는 평도 있다.
대표작은 <오감도> <거울> 등이 있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상의 시 중에서 <거울>은 비교적 이해가 가는 시라는 것이다. 하긴 <거울>을 읽으면서는 어떤 의미일지 어느 정도 파악되지만 <오감도>에서 '헉!' 했다. 그 느낌은 고등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책에 나온 '감상'을 정독해보았다.
이상 <오감도> 감상
감상
이 시는 연작시의 일부분이다. 1934년 7월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되었을 때, 독자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크게 반발했던 모양이다. 시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니, 이상이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고 화가 났을 법도 하다.
그런데 그 뒤 많은 평론가들은 이상의 이러한 시풍을 다다이즘이라고 평했다. 확실히 이상의 시풍은 다다이즘, 그것이었다. 하나, 문제되는 것은 다다이즘이 문학 사조사적인 가치 문제를 차치하고, 당시 서구의 다다이스트들 못지 않게 절망적인 상황을 살면서도 이 나라 시단에서 다다적인 시풍을 지녔던 사람은 오직 이상 한 사람뿐 이었다는 점이다.
이상은 홀로 이 시대적 조류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그러니 작자인 이상의 입장에서 볼 때 잠자는 모든 독자들이 자신의 시를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다이즘의 시가 시예술의 사조사적인 면에서 그 예술적 가치에 있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이상의 시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이상의 시대적 감각이 문학적으로 낙후된 풍토에서 선진인 서구의 저들과 거의 동시에, 그것도 홀로 이러한 문예사조의 유행적 첨단을 갔다는 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이 <오감도>는 평자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다. 이상의 모든 시가 그렇듯이 또 다다이즘의 시가 아니어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해석은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에서 독자가 뚜렷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공포감과 쫓기는 절박감인 것이다. 이 시에서 <길>은 인류 역사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이 뚫려 있든, 막혀 있든 지구상의 모든 국가, 또는 민족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서로 무서운 존재, 또는 무서워하는 존재로 있으면서 말이다.
1924년이란 일제 암흑기를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절망의 시기를 살은 지식인의 체념의식을 우리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가히 의미를 지닐 수 있었으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걸레 같은 육신 하나뿐일 때, 이 절망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고, 한국 민족만의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 공통의 것일 때 질주를 하나마나란 절망의식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출처: 한국의 명시해설, 보성출판사, 이상 <오감도> 감상 전문 (216~217쪽)
아, 다다이즘과 연관시켜 설명하다니! 그리고 그 무렵의 예술사조가 우리나라 이상 시인에게서 자연발생했다고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그러면 '다다이즘'에 대해서도 짚어보자.
다다이즘
다다이즘
ㆍ제1차세계대전(1914~1918)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ㆍ'다다'(어린이가 갖고 노는 말머리가 달린 장난감)라는 말은 우연히 사전에서 선택된 어휘인데, 어린이를 닮고 싶은 욕망과 인간의 충동을 암시한다.
ㆍ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였다.
· 다다이스트 화가들의 시각적인 감각과 다다이스트 작가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결합시킨 만 레이의 <이성의 귀환,1923>, 르네 클레르의 <막간,1924>, 페르낭 레제와 더들리머피의 <기계적 발레,1924>, 그리고 마르셀 뒤샹의 <빈혈 영화,1926>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영화에 속한다.
ㆍ뉴욕에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9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 네이버 영화사전)
이상의 시와 다다이즘,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바라봐야겠다. 오늘은 모처럼 발견한 나뭇잎 하나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본다. 책에 꽂아둔 나뭇잎들에 언제 어떻게 꽂아두게 되었는지 그 마음까지 적어두었다면 꽤나 흥미로운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오늘도 힘차게 하루를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