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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07. 2021

박목월 「청노루」 「나그네」 「가정」

오늘은 어떤 시를 감상할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나 학창 시절에 외웠던 시가 떠오른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다. 책장을 찾아보다가 박목월의 시를 오래전 책에서 발견하였으니……. 오늘은 전면컬러인쇄를 자랑하는 '컬러판 시집' 『한국의 명시』에서 박목월의 시를 감상하기로 했다.


이 책의 표지에 보면 '오늘의 젊은 지성을 위한 영혼의 애송시!'라고 적혀있다. '영혼의 애송시 351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엮은이가 안도섭. 5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데뷔, 검색을 해보니 2009년에 문학인생 50년을 맞이하셨나 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 감상을 할까 하고 해당 페이지를 펼쳐보니, 시 한 편에 한 페이지씩이 아니라 그냥 계속 연결된다. 그리고 글자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작다. 그러고 보면 글자 크기라든지 종이 질감, 글자체 등 그 모든 것이 참 많이도 변했다. 하지만 그다지 변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이 책의 띠지에 있는 내용이었다.


오늘의 젊은 지성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점점 지쳐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중병(?)을 앓게 될른지도 모른다. 하루 단 한 시간만이라도 우리가 삶에 쫓기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참으로 아쉬운 요즈음이다.
풀과 나무가 없는 대지, 하늘이 없는 도심의 탁한 공기 속에서 무엇인가에 허덕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이런 때 한 줄의 시를 읊는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의 가슴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해주는 위안제가 될지도 모른다. 시는 우리들의 마음의 하늘이요, 가슴의 대지에 심어진 울창한 풀이며 나무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시상(詩想)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발견한다.

(출처: 한국의 명시, 진화당, 책날개 중에서)


어떤가. 약간의 어투를 제외하고 내용만 본다면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1991년 재판 발행본이 나온 지 3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책의 책날개에 있는 말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바쁘지 않게 살 수도 없으니, 그냥 각자 살면서 조금씩만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고, 한 줄의 시로 마음속의 노폐물을 제거해보면 어떨까.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서정시이다. 「청록집」(1946.6.6)에 수록된 작품이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자연과 인간의 조화미를 노래한 시이다. <청노루>와 함께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상아탑」(1946.4) 5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가정






지상에서



아홉 켤레의 신 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동아 귀염동아



우리 막내동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생활의 책임자인 아버지로서의 고달픔과 애정, 그리고 연민의 자의식을 주제로 한 시이다.




오늘은 박목월의 시를 감상해보았다. 박목월의 시는 운율이 드러나서 학창 시절에 단체로 외우기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자판을 치면서도 운율을 느끼며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마음을 정화하는 데에는 사실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만도 아니다. 잠깐의 감상 시간으로도 마음속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다. 박목월의 시에는 그러한 힘이 있으니 다시 한번 읊어보며 자연 속 풍경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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