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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09. 2021

이근배 시 「살다가 보면」외 감상

제주에는 '살암시민 살아진다'라는 말이 있다. 살다 보면 어떻게든 다 살아진다는 의미이다. 삶이 아무리 각박해도 버티고 견디다 보면 삶은 이어지는 것이다. 다들 자신이 견딜 만큼의 무게를 짊어지며, 아니 약간은 버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예상처럼 안 될 때도 있고, 뜻밖의 행운이 다가올 때도 있다. 사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삶을 채워나갈까…. 생각이 많아진다. 오늘은 이근배 시 「살다가 보면」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이근배는 시인이자 시조시인, 충남 당진 출생이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김동리, 서정주의 창작지도를 받았고, 1961~64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 각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 시조, 동시 등이 당선되었다. 1963년 제2회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 시조 2개 부문 수석상. 1964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문학부 특상 「노래여 노래여」로 수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상 · 만해대상 등 수상. 은관문화훈장 수훈.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심지어 일상생활 중 언어를 훼손시키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 한국 현대시가 진정한 모국어의 닻을 올린 지 100년, 이 시간을 잊고 있었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의 언어를 더욱 갈고닦고 아름답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시인의 말


모국어에 바치는 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나는 자주 듣는다. 인류가 시를 처음 가진 날로부터 끝없이 묻고 대답했을 이 화두에 나는 '사람의 생각이 우주의 자장을 뚫고 만물의 언어를 캐내는 것'이라고 적은 일이 있다. 어차피 시를 가리키는 말은 허사虛辭일 뿐 그 적확한 풀이는 한 편 한 편의 시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주보다 더 너른 어머니의 나랏말씀과 대자연의 어떤 소리까지도 다 담아낼 수 있는 한글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무량의 은혜이고 홍복임을 나이가 들어서야 뼛속 깊이 새기고 있다. 내 어리고 무딘 붓끝으로 저 불가사의의 세계의 티끌 하나인들 어찌 그려낼 수 있으랴. 부질없음을 깨달으면서도 나무나 풀, 새나 물고기들의 지저귐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파먹고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시가 진정한 모국어의 닻을 올린 지 100년, 개벽처럼 눈부시게 모국어를 일깨워온 이 땅의 큰 스승들께 향을 피워 올리는 뜻으로 이 소책자를 바친다.


2013년 5월 3일

이근배




살다가 보면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이근배 시서화 『살다가 보면』에서도 이 작품을 볼 수 있다. 김종천 시인이 엮은 책인데, 사천 이근배 시인 등단 50주년 기념 시서화집으로, 이근배 시인이 직접 붓으로 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에는 이근배 시인의 시 중에서 시조 한편을 올려본다.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시 중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정갈하게 표현한 시이자,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자식의 마음을 담아서 여운이 남는다.



어머니, 물동이에 달을 길어 오셨다










옹달샘 새벽달을



물동이에 길어 와서





장독대 정화수 올려



띄우시던 어머니





꽃산에 오르실 때에도



달은 두고 가셨다









운학상감 청자 말고



청화모란 백자 말고





어머니 손길에 닳아



윤이 나던 질항아리





그 사랑 어루만지고 싶다



얼굴 부벼 안고 싶다.





오늘은 이근배 시인의 시를 감상해보았다. 검색해보니 이근배 시인은 시, 시조에서의 문학적 성취 외에 문화 예술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품 벼루 컬렉터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유학자인 할아버지와 면암 최익현의 수제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붓글씨를 익혀 왔는데, 한국 벼루 500여 점, 중국 벼루 500여 점 등 총 1000여 점에 달하는 벼루를 갖고 있다고 한다. 당(통일왕조), 북송, 명나라, 청나라대 벼루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황제가 사용하던 벼루, 조맹부 등 명사들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벼루를 여럿 갖고 있다고 하며, 벼루에 관한 연작시만도 무려 80편 정도를 썼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공주사대 진학해서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으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로 지원을 하여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인이라는 한 길만 걷고 있다. 게다가 벼루 수집이라는 개성 있는 취미를 꾸준히 실행하고 있으니, 그 꾸준함이 부럽다. 나는 평생에 걸쳐 무엇을 해나갈지 오늘은 진지하게 생각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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