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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10. 2021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外

이 시는 예전부터 접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감상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왜 갑자기 버지니아 울프가 나왔는지, 그녀의 생애가 어땠는지, 이 시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나는 한동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감상해야겠다. 요즘에야말로 지금껏 미루어왔던 시 감상을 하는 귀한 시간 아니겠는가. 오늘은 박인환 시를 감상해보아야겠다.




박인환 (1926년~1956년)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서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 1946년(21세)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등단. 6·25 동란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부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 경향신문사를 거쳐 대한 해운공사 소속 화물선 사무장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함.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 왕성한 시작 활동을 펼침. 1956년 31세의 짧은 나이로 사망.

(출처:내 영혼의 숲에 내리는 마음의 시 중에서)


시인의 삶을 알고 나서 그 시인이 쓴 시가 다시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박인환 시인의 시가 그렇다. 그의 시는 그냥 떠올려도 두 편은 제목이 생각난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세월이 가면」과 제목만으로도 이 시를 암송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목마와 숙녀」 말이다.



그의 생애를 짚어보자면 1944년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 이한직, 김수영, 김경린, 오장환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고,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혼인.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50년 모더니즘운동 전개, 1951년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 1955년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목마와 숙녀」 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이 정도의 사전지식을 알고 감상하면 또 다르게 다가오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를 감상해보아야겠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나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검색해보니 박인환은 시인 이상 기일 4월 17일을 3월 17일로 착각하여 시 「죽은 아폴론-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를 발표하고 줄창 술을 마신 뒤 4일 간의 폭음 탓에 급성 알콜중독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가 착각을 한 것인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는 본인만 아는 거라고. 특히 「세월이 가면」은 그 사람 이름을 잊을 정도면 먼 훗날 중년 이후에 회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너무 짧은 생애였다.



오늘은 이 시까지 감상하면서 마쳐야겠다.





죽은 아폴론 ㅡ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







그 날 당신은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睡眠)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이라고.




박인환의 시 ‘죽은 아폴론 ㅡ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 전문 (출처=《한국일보》 1956년 3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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