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접몽 Apr 13. 2021

안도현 시 「스며드는 것」 「가을엽서」 外

얼마 전 반찬 사려고 들렀던 반찬가게에서 간장게장을 팔고 있었다. 먹어보고 싶다거나 맛있겠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배 속에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그 시 말고도 「너에게 묻는다」도 유명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말하는 이 시는 뜨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며 기억에 새겨진다. 단 연탄재를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 '안도현'을 떠올려야 생각나는 시다.



또 어떤 시가 있을까. 오늘은 안도현의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읽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8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6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1998년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이 책이 2002년 3판 3쇄본임을 감안하여 그 이후가 궁금하여 검색해보았더니,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이며 2007년 제2회 윤동주문학상 문학부문 수상을 하였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 쭈삣쭈삣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봄날, 사랑의 기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하였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 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



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사랑해요, 라는 말이 당신에



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는 작은 것도 좋다고,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도 좋다고,



높은 것보다는 낮은 것도 좋다고,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도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시고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오늘은 안도현의 시를 살펴보았다. 일반 대중에게 인지도도 높으면서 계속 시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고 문예창작과 교수로도 재직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리라 예상된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다려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치환 「깃발」 「바위」 「행복」 「그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