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반찬 사려고 들렀던 반찬가게에서 간장게장을 팔고 있었다. 먹어보고 싶다거나 맛있겠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배 속에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그 시 말고도 「너에게 묻는다」도 유명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말하는 이 시는 뜨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며 기억에 새겨진다. 단 연탄재를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 '안도현'을 떠올려야 생각나는 시다.
또 어떤 시가 있을까. 오늘은 안도현의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읽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8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6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1998년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이 책이 2002년 3판 3쇄본임을 감안하여 그 이후가 궁금하여 검색해보았더니,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이며 2007년 제2회 윤동주문학상 문학부문 수상을 하였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 쭈삣쭈삣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봄날, 사랑의 기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하였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 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
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사랑해요, 라는 말이 당신에
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는 작은 것도 좋다고,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도 좋다고,
높은 것보다는 낮은 것도 좋다고,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도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시고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오늘은 안도현의 시를 살펴보았다. 일반 대중에게 인지도도 높으면서 계속 시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고 문예창작과 교수로도 재직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리라 예상된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