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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12. 2021

유치환 「깃발」 「바위」 「행복」 「그리움」

제주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비나 눈이 내릴 때 보면 옆으로 내릴 때도 종종 있다. 사람들이 커다란 골프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다. 작은 3단 우산으로는 비를 피할 수 없을뿐더러, 바람이 같이 불 때면 오히려 걸거치기만 하다.



차를 몰고 서귀포 시내의 비석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깃발이 쪼로록 있는 것을 본다. 차 안이라고 바람을 느끼기 힘들다고 해도 겉모습만 보면 안다.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보고 지금 어느 정도의 바람이 불겠거니 예상해보고, 비석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있을 때에 한 번 더 확인한다. 깃발의 흔들림을 보면서 말이다.



그때마다는 아니지만, 종종 유치환의 시 「깃발」을 떠올리곤 한다. 차 안에서 보는 깃발 펄럭이는 모습은 정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니까. 그리고 누가 저기에 그걸 매달아놓았는지에 대해 논하는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평범한 무언가 중 아직 어느 시인도 노래하지 않은 그런 소재는 없을까? 내가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공중에 매다는 심정으로 먼저 써볼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유치환의 시를 감상해보고자 한다.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1936년 <조선문단>지.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1941년 4월 <삼천리지>





행복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 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유치환의 시를 읽으면서 시를 쓸 당시의 진솔한 마음을 엿본다. 행복, 그리움, 향수에 젖은 마음 등 추상적인 단어로 접하면 막연할 감정을 이 시 한 편에 오롯이 담아냈으니, 오늘은 유치환의 시를 음미하며 그 마음을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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