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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19. 2021

도종환 시 「접시꽃 당신」 外

오랜만에, 아니 사실 처음이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읽고자 마음먹은 것 말이다. 책장에서 꺼내들고는 이번에는 한번 감상해보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참, 이상하다. 애절한 연시를 쓰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만 그리워해야 하는 법은 없는데, 우리는 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며 시집이 베스트셀러로 팔렸던 것만큼 도종환 시인의 재혼에 배신감을 느끼고 등을 돌린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일단 '판단보류'하기로 한다. 그리고 1988년 10판 발행본의 시집이 드디어 2021년의 나에게 시어들을 펼쳐 보인다. 내 마음이 이 시를 받아들일 때까지 이 책은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1986년에 초판 발행했고 1988년 1월에 10판 발행한 책을 펼쳐들었다. 검색해보니 가장 비슷한 책이 1991년 발매한 실천문학사 책으로 DB를 발견할 수 있어서 넣어보았다. 그러면 간단하게 도종환 시인에 대해 살펴보아야겠다.




도종환 (1955.9.27~ )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박하고 순수한 시어를 사용하여 사랑과 슬픔 등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결백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첫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는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등, 리얼리즘적인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접시꽃 당신』(1986)에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시집은 독자의 큰 호응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 활동으로 해직·투옥되었다가, 1998년 복직되어 2004년까지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 재직했다.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상, 2009년 제22회 정지용 문학상, 2010년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대상, 2011년 제13회 백석문학상, 2012년 제20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16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읍니다'는 '습니다'로 바꿈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



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 꼭 살아 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떠난 뒤로는






당신이 떠난 뒤로는



빗줄기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내리고



밤별도 당신으로 인해 머리 위를 떠 흐르고



풀벌레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와 울었다





당신 때문에 여름꽃이 한없이 발끝에 지고



당신 때문에 산맥들도 강물 곁에 쓰러져 눕고



당신 때문에 가을 빗발이 눈자위에 젖고



당신 때문에 눈발이 치고 겨울이 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은 자의 편이 되어



떠나는 것이다 떠나야 한다 속살대지만



나 하나는 당신 편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





이 세상 많은 이를 남기고 당신 홀로 떠난 뒤론



새 한 마리 내게는 예사로이 날지 않고



구름 한 덩이 예사로이 하늘 질러 가지 않고



바람 한 줄기 내게는 그냥 오지 않았다.



책뒤에

그동안 떨어져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이웃의 얼굴이 하나씩 둘씩 별처럼 떠오릅니다.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시작한 일이 더욱 크게 부끄러움을 불러들인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참 여러 이웃께 미안합니다.
제 개인의 가슴아픈 넋두리를 이게 무슨 여럿에게 할 소리라고 시집으로 엮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낯이 뜨거워집니다. 어떤 한 사내가 앞서 간 제 아낙에게 한 혼잣말이라고 보아주시고 너그러이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1986.11
도종환


우리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간다. 소년이 중년으로 노년으로, 나인 듯 나 아닌 듯 변화하며 삶이 이어진다. 시인은 지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래전 그 순간의 그 감정도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 시집 속에 담긴 시편들이 내 마음을 두둥,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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