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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20. 2021

정호승 시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外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읽다가 정호승의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라는 시를 떠올렸다. 정호승의 시는 「수선화에게」가 제일 유명하지만, 나는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가 인간적이어서 좋다. 내 속마음을 들킨듯 하달까.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에이, 그거 좀 참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성질이 나서 견딜 수 없는 그런 것 말이다. 나또한 내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에이, 그거 좀 참지'라고 생각할 법한 그런 일 말이다. 그런 걸 잘 건드려주는 시다. 생각난 김에 오늘은 정호승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 책장에 있는 정호승 시선집을 꺼내들어본다.




정호승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다.

제3회 소월시문학상, 제10회 동서문학상, 제12회 정지용문학상, 제11회 편운문학상, 제23회 상화문학상상화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정호승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중에서)


이 시선집의 제목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미안하다」라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 가져왔다. 2021년 수능특강에 나온 시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는 이 책에 없지만 「윤동주의 서시」가 있어서 함께 감상해본다.




윤동주의 서시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한 그루가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퍽하게 오줌을 싸 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고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 봐 두려워라








*2021년도 수능특강에 수록된 시






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오늘 살펴본 시선집은 정호승 시인의 시에 박항률 화백의 그림이 담긴 책이다. 시와 그림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누린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2년 만에 초판 16쇄를 달성한 점도 시대적 공감을 누렸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다시 한번 이 책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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