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를 책으로 배운 정리 귀차니스트의 정리 이야기
문득 예전의 나를 생각해본다. 분명히 내가 맞는데 내가 아닌 것도 같다.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행동했는지,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낯부끄럽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사는 게 밋밋해서 별로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다고 말이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던 그때의 나 자신을 뜯어말리고 따끔한 충고를 하고 싶다. 행복에 겨운 소리 말라고, 그게 행복이었다고 말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회오리바람처럼 불어닥친 격변을 느꼈을 때, 폭풍은 잠깐 멈추었지만 언제 다시 몰아칠지 몰라서 불안할 때, 계속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 시간을 보내며 무작정 책을 집어 들고 읽어나갔다. 살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 견뎌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읽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는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를 담은 책이다. 거기에 보면 하이데거의 한 마디가 있는데, 책 한 줄 읽기 버거운 나를 책의 세계로 확 끌어당긴 힘 있는 발언이었다.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다.
_마르틴 하이데거
생각해보니 철학을 하는 시간은 따로 있는 듯하다. 항상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고 삶을 고뇌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시기와 계절적 요인까지 모두 맞아떨어져야 잠깐씩 생각에 잠긴다. 특히 '알랭 드 보통'에 의해 창립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인생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얀 드로스트의 책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에서는 '생각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시작됩니다'라고 언급한다.
생각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시작됩니다. 당연시되던 것이 멈추는 순간 당연시되던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습관이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 특별한 습관이 내는 목소리를 습관이 멈출 때에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이 쏟아져 나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지, 내가 무슨 일로 이런 일을 겪는 것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누구일까, 내가 두렵거나 슬플 때 혹은 내 인생이 철저히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의 운명과 타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의견은 고려되지 않고 저항하지 못하는 공에 불과할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6쪽
생각해보니 인생에서 역경에 부딪혔을 때 내 안에서도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나를 뒤흔들었던 것 같다. 나 또한 그 순간, 당연시되던 모든 것이 멈추던 그 당시에 그런 질문을 마구 쏟아부으며 괴로워했다. 그 질문을 쏟아내던 나의 마음도 지금과 같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순간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서 벗어나기만을 원했고,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고 그래서 무기력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전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불쑥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만 생각했고, 내가 너무 나약해져서 이런 질문들의 공격을 받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 책을 계기로 생각을 달리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고뇌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시간을 종종 마련하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일찍이 영국 시인 새뮤얼 콜리지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일찍이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당신 앞의 한 인간이든 아니면 하나의 꽃이든 아니면 한 알의 모래알이든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 It is!'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말이다. (중략) 그러한 경험을 가진 적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정신을 경외와 경탄으로 사로잡는 어떤 신비의 현존을 느꼈을 것이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68쪽
오늘은 오랜만에 맨 정신으로 철학적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보낸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이 쏙 빠지도록 휘몰아치는 고난의 시간도 아니니 '맨 정신'인 것이다.
그동안 사물의 존재 그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기는커녕, 나의 존재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며 정신없이 시간만 보냈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에 잠기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존재 그 자체를 느끼고,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에도 경이로움을 느끼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 결코 정리나 청소를 하지 않은 변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