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익히는 여행

by 호접몽


'그때그때 여행기를, 아니 일기라도 적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나도 매일 일기를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날의 여행을 마치고 나면 피로가 몰려와서 살짝 고민이 된다. 노트를 꺼내 일기를 쓸지, 다음 날을 위해 잠을 더 자둘지 선택을 해야 한다. 늘 '잠을 더 자두자'는 생각이 승리하곤 했다.



사실 약간 아쉽다. 무언가 더 기억에 잡아두려면 나는 일정을 좀 더 느슨하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기록이 더 가치 있게 남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냥 남을 만큼 남은 것이리라.



우리는 무언가 대단한 사건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특히 여행이 그런 기대감을 심어준다. 하지만 몇 번의 여행을 거치고 나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세계 일주 1호 스님인 원제 스님의 세계 일주 여행기를 2권의 책으로 묶은 『다만 나로 살 뿐』은 여행 중의 기록과 생각을 풍성하게 엮어낸 책이다. 그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정말 세계 일주를 하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대부분 자신이 살던 삶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간다고들 하던데."
"왜 그런 걸까요?"
"아무래도 사람이란 이미 제 볼 것 다 정해놓고, 그렇게 보기 마련일 테니까.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그 보는 관점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거든. 살아가며 이미 그렇게 보도록 관점이 익어졌으니까 말이지. 경험의 양이나 빈도가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 경험이나 기억을 스스로 소화할 수 있는 관점이나 안목이 전환되는 데에는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사람이 철학이라는 걸 하지 않겠어? 그렇게 충분한 숙고와 정립의 과정을 거치면 새로운 안목을 얻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새로운 안목이라는 것도 결국 자신의 삶으로 입증될 때에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생각이 대단할 수도 있고, 말이란 것이 훌륭할 수도 있지. 그런데 결국엔 그 생각이며 말이 자신의 삶으로 드러나고 본인 스스로 그렇게 살아야지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앎이나 안목은 당연히 중요해. 하지만 제일로 중요한 것은 그 앎과 안목이 드러나는 자신의 삶이야.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익어가면서 온전해지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그런 점에서 참 다행이지. 인생은 참 길거든."

『다만 나로 살 뿐』 1권 178~179쪽



앗, 스님이 좀 길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호~! 그렇구나!' 생각한 것은 사실 바로 그다음에 있는 말이었다.



제가 아는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리터의 물이 끓는 데에는 100킬로칼로리의 열량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수증기로 기화되기까지는 이보다 훨씬 많은 540킬로칼로리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끓는 데에 필요한 열량보다 공기 중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가는 데에 더 많은 열량이 필요하듯, 새로운 앎을 얻는 것보다도 그 앎이 삶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만 나로 살 뿐』 1권 180쪽




생각해 보면 스쳐 지나가버린 수많은 기억들이 사라진 데에는 일단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말처럼 좀 더 부지런 떨어서 기록해놓지 못한 데에 일차적으로 원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새롭게 보는 것을 깨닫고 숙성하고 발효시키는 '익힘'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인생의 강렬한 기억이라면 그것이 왜 잊히겠는가. 그리고 별것 아닌 기억이라도 나 나름대로의 깨달음과 익힘의 노력이 있었다면 내 인생에 벌써 녹아들어 있지 않을까.



'앎이 삶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라는 문장을 문득 곱씹어 본다. 여행도 그렇고, 독서도 그렇고, 인생에서 그 무언가가 삶으로 녹아들어 어우러지도록 오늘은 나만의 생각을 '익혀보는'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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