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빨간색을 생각해본다. 빨간색이라! 어디부터 떠올려볼까. 사실 생활 속에서 빨강은 나와 거리가 멀다. 생각해보니 내가 입는 옷은 주로 어두운 색이다. 가방도 청색, 신발도 검은색이다. 나는 태어날 때에는 2.8kg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라면서 이~~ 따만 해졌다. 작고 아담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에 약간은 열등감 같은 것이 있다. 또래 남자 사람 친구들이 사진이라도 찍을 때면 나를 멀리하며 저쪽으로 가면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왕따 당하는 듯하다고 해야 할까. "나도 네 옆에서 사진 안 찍어."라고 말하면서도 주눅 드는 느낌이었다. 어두워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니 그냥 당연한 듯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냥 튀지 않고 그들 중 한 명으로 조용히 존재하는 것이 편안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달랐다. 특히 인도 여행을 할 때에 그곳에서 본 다양한 색감의 천에 내 감각은 살아난 것이다. 흑백텔레비전이 칼라로 전환한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동안은 튀지 않기 위해, 혹은 유행하는 색깔이 그래서 어둡게 지내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다들 튀는 색깔로 개성을 표현하고 있어서 오히려 어두운 색의 옷을 입으면 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신선했다.
『버건디 여행 사전』이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여행은 여행 장소의 매력을 짚어보는 것으로만 추억했는데, 여행 중의 한 가지 색깔을 엮어서 책을 만들다니 그 발상이 독특했다. 저자는 '버건디'에 관한 기억들을 소환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누구든 겪었을 법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여행 중에 스쳐 지나갔을 듯한 사소한 것도, 버건디로 재탄생한다. 버건디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쩌면 소소해서 아무 느낌도 없을 법한 것을 끄집어내어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특별함이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성의 여행 에세이였다.
특별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특별함을 찾아보면 어떨까?
『버건디 여행 사전』 6쪽
어쩌면 '빨강'이라고 표현되는 색깔에는 '버건디'도 포함되겠다. 칙칙한 빨강을 일컫는 버건디는 자주색, 팥죽색이라고도 한다니, 버건디 고무 대야, 버건디 드레스, 버건디 뱅쇼, 버건디 소화전, 버건디 우체통, 버건디 크리스마스, 버건디 팥죽 등의 버건디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색깔 '버건디'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마무리하고, 기억 속의 '빨강'으로 오버랩하며 장면 전환을 해야겠다.
대만 단수이에 가던 길이었다. 주로 대만을 목적지로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파리에서 유학 중인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대만에서 경유한다. 파리에서 오랜만에 가족상봉을 하고 하얗게 불태우고 나면, 포도주 많이 마시고 밤새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엄마가 우리 태어난 것부터 이야기하셨음 대만은 여행의 마무리를 하기에 좋은 곳이었고, 단수이의 일몰을 바라보는 것으로 차분한 마음으로 정리를 했던 것이다.
단수이에 가기 위해서 MRT를 타고 종점인 단수이 역까지 가서 내리고, 거기에서 일몰 명소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도 좋지만, 상점들을 슬슬 구경하면서 가는 것이 일몰 시간에 가까워져서 좋다. 그때로 기억한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라는 소리다. 어느 문구점에 들어갔고 '문창필'을 보고는 충동구매를 하고 만 것이었다. 붓 모양으로 조각된 옥, 중국 대만 그쪽에서 행운의 상징인 빨강. 딱 봐도 관광객을 위한 작은 기념품 정도로 되어 보였다.
'文昌筆 문창필'은 예전부터 지혜를 얻는 데 유리하고 영감을 떠오르게 하며 창의력을 키워준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검색하고 알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시간이 오래 흘러서 '문창필'이라는 글자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부분은 삭아버렸다.
하여간 그렇게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오게 된 문창필. 방 한 귀퉁이에 걸려서 서서히 잊히고 있었으니, 드디어 나의 눈에 다시 띄어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알라딘의 램프보다는 훨씬 빠른 기간이기는 하다.
한참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얘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 작은 마스코트가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엄청 돕고 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생각해보니 특히 올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원 없이 읽고 있고, 올해 들어서는 글쓰기도 매일 도전하고 있으니, 이 녀석 우리 집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너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