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학창 시절, 어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들, 지금은 아주 친한 것 같지? 몇 년만 지나 봐라. 나중에는 이름도 잘 생각 안 날걸?" 그때 아이들은 소리 높여 "에이~~~~~~말도 안 돼"라고 했고, 그 당시에는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제야 그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다. 얼굴은 떠오르지만 이름이 가물가물한 동창, 어쩌면 얼굴과 이름 모두 잊어버렸을 동창들…. 그리고 그 선생님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야 문득 그때 그 말씀이 맞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스쳐 지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재잘재잘 친화력을 내보이며 말을 걸었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 같은데 굳이 굳은 표정으로 쌩하니 지나갔다. 여행 중에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싫었나 보다. 굳이 반가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얼굴 찌푸릴 것도 없을 텐데 왜 그럴까,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은 그 얼굴조차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좋았든 싫었든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하긴 그 모두를 기억한다면 내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너무 과부하된 내 뇌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적절히 나는 (아마 나의 뇌는) 기억과 망각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재창조하고 있을 것이다.
<세계테마기행> PD이자 오지 전문 여행가인 탁재형 PD의 여행산문집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분명히 존재했던, 하지만 삶의 큰 줄거리에선 벗어난 순간들. 이 기억들이 아직껏 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어딘가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는 커피잔이 있다. 손을 뻗으면 매끈하고 단단한 질감이 따뜻한 온기와 함께 전해져 온다. 갓 내린 커피의 향이 코 안을 가득 채운다. 감각은 너무나 선명하다. 이 순간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빛, 소리, 냄새와 감촉에 대한 기억은, 소멸한다. 기록되지 않는 이상 기억은 희미해지고, 언젠가 사라진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35쪽)
살짝 후회된다. 나 역시 여행 중에 부단히 무언가를 기록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커피 한 잔에 얼마라는 정보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실 때의 느낌이라든지, 갓 내린 커피 향, 독특한 그곳의 분위기와 내 감상 같은 거였다. 다시 여행을 한다고 그때의 느낌을 되살릴 수 없겠지만, 많은 것을 잊고 난 후에야 소멸하는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가볍게 슬쩍 넘기다가도 어느 문장 앞에서 멈춰 서게 된다. 과거의 여행을 떠올리기도 하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어리벙벙해지며 지독하게 공감한다. 나의 여행도 그러했듯이. 내 마음도 그러하듯이.
학창 시절에 선생님 말씀처럼 그때에는 생각지 못한 일이지만 그 시절 그 친구들과 앞으로 평생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도 문득 그 여행지를 떠올리면 함께 생각나기는 하지만 기록되지 않아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존재들을 떠올리며 사무치게 그리워해 본다. 여행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 한때 나의 기억을 채워준 사람들, 기록에 남기지 않아서 사라져 버린 그들… 그 모든 인연들에게 마음을 담아 감사의 메시지를 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