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서울 토박이였다.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이곳에 일 년만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실행했고, 그 일 년이 한해 한해 더해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원래 이곳이 고향인 양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종의 귀차니스트 여행법인 듯하다. 처음 이곳에 올 때에는 서울에서 가끔 제주로 여행 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제주를 여행하다가 가끔 서울에 가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처음 이주해왔을 때에는 제주에 '신구간'이라는 기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무작정 왔다. 신구간은 제주도의 세시풍속 중 음력 정월 초순경을 전후하여 집안의 신들이 천상으로 올라가 비어 있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보통 그 기간은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 사이로 보통 일주일이 된다. 이 기간에는 이사나 집수리 등 여러 가지 금지된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신구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상상해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한 건지 그 옛날 어르신들이 대단했다. 신들이 뭔가 보고를 하려고 지상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람들은 쿵쾅쿵쾅 이사도 하고 망가진 것도 고치면서 기간 내에 부랴부랴 끝내 놓고는, 신구간이 끝나면 아무것도 안 한 척 시치미를 딱 뗀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 당시 들어갈 집 하나 없겠냐는 생각으로 무작정 서귀포로 향했지만, 정말 없었다. 계약은 미리 해도 이사 들어가는 것은 2월 1일, 즉 신구간에 해당되는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들어갈 수 있는 집을 구한 게 어디냐며 붕 뜬 기간 동안 실컷 여행을 했다. 한 달은 제주 여행, 한 달은 유럽 여행이었다.
그 당시에 한 달 동안 제주 여행을 한 것은 지금껏 이곳에 살면서 제주 여행을 한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부지런했다. 동서남북을 내키는 대로 막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여행자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든 호기심 가득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정착하고 나니 그때 그 마음은 싹 잊고 다시 귀차니스트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 『마음이 풀리는 작은 여행』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것은 영원히 가지 않을 가능성과 종이 한 장 차이다…….
『마음이 풀리는 작은 여행』 (40쪽)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여행할 곳 천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일상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봄과 가을은 짧고, 여름과 겨울은 길고 힘든데 버텨내야 하는 계절이다. 여름에는 곰팡이와 벌레 천지, 이따만한 바퀴벌레가 날아다니고 거미도 스케일이 다르며 각종 벌레가 매일같이 서프라이즈를 선물해주는 곳. 겨울이면 칼바람에 은근히 춥기도 해서 봄이 오기만을 기다기는 곳.
특히 이런 겨울은 어디론가 다닌다는 '마음먹기'가 잘 안되고 뜨뜻한 방 안에서 책 읽고 글 쓰며 커피 한잔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 물론 지금은 마음먹으면 안 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겸사겸사 여러 이유로 조용히 2020년을 마무리한다.
제주를 여행하는 나만의 방법은 그냥 여기서 살아보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다. 일 년 사계절, 또다시, 계속, 그렇게 말이다. 굳이 한라산은 오르지 않더라도 눈 쌓인 산을 바라볼 수는 있고, 바다가 보고 싶으면 차를 몰고 조금만 길을 나서면 눈앞에 보이는 곳에 있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제주를 차곡차곡 마음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