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내 취향이겠다 싶은 영화가 있다면 꼭 영화관에서 관람을 하는 편이다.
영화 취향이 마이너한 탓에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 드물기도 해서,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든다.
가장 최근에 내게 그런 느낌을 줬던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괴물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보게 된 영화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라는 작품인데, 우연한 기회에 접한 트레일러 영상만으로 이건 무조건 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잔잔한 스토리에 영화의 배경 장소는 도쿄, 그리고 올드팝으로 구성된 OST까지.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모든 구성 요소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퍼펙트 데이즈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도쿄에서 화장실 청소부로 근무하는 주인공 히라야마.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일상을 보내는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출근 전에는 늘 주차장에 있는 자판기에서 같은 캔커피를 사고,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늘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듣는다.
일터에 도착한 뒤에는 같은 방식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고, 휴식시간에는 매일 같은 공원을 찾아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로 남긴다.
일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대중목욕탕을 찾아가 쌓인 땀을 씻어내고, 이후에는 단골 식당에 가서 저녁과 반주를 한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잠드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반복되는 삶이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일상 속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에서 소소한 행복을 얻는다.
자신의 취향이 담긴 것들로 하루를 채워서 인지, 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초반에는 정말 완벽한 하루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별할 것이 없지만 거슬릴 것도 없고 소소하지만 행복한 것들로 채워진 하루.
화장실 청소라는 궂은 노동을 하면서도, 그만의 행복들로 하루를 채우며 영화 제목답게 퍼펙트 한 날을 보낸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모자람 없어 보이는 그의 삶에는 무언가가 결여된 듯했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오면 무너지고, 잊고 지냈던 관계의 결핍을 느낀 날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는 사실 안정된 존재가 아니라 불안한 존재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반복과 규칙 속에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나는 친구가 있어 연락을 해 봤다.
취미며 취향이며 주인공의 대부분의 그 친구와 비슷해서 영화 초반부에는 '이 영화 안 봤다고 하면 추천해 줘야겠다'라는 생각뿐이었는데, 후반부로 향할수록 다크 해지는 영화를 보며 사실은 조금 조심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마침 본인도 오늘 새벽에 영화를 보고 왔다고.
감상평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는지, 당장 토론을 하자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 친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생각이 참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모두가 이 영화를 평화롭다고 표현하지만, 그와 비슷한 입장에 있어본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평화로운 영화가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하루를 왜 그렇게 보내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우리의 눈에 비친 그는 상당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빼곡하게 하루를 채우려 노력하고, 그 노력을 통해 내 하루가 의미 있었다고 느끼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 속 그의 취미 중 하나는 사진 찍기였는데, 그가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 않았다.
매일 사진을 찍고, 휴일마다 현상소에 찾아가 필름을 인화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사진을 대충 확인하고 그저 박스에 넣어둔다.
그렇게 채워진 박스들이 장롱 안에 빼곡히 쌓여있는 장면도 나온다.
그 또한 그가 공허함을 채우려는 행동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마침 나 역시도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터라, 그 질문이 더욱 심오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내려놔야 하고 용기 내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 모습이 비치는 주인공을 보며, 나름의 해답을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착잡했지만, 나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에 왠지 개운한 마음도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영화가 많았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또 낯선 사람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 말이다.
나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준 감독님, 그리고 기꺼이 감상평을 나눠준 친구에게 감사를.
<번외>
영화관에서 나오는 길에, 같은 상영관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던 분들의 감상평을 들었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주부분들이셨던 것 같은데, 그분들의 감상평이 너무 귀엽고 순수하셔서 복잡해진 내 머릿속을 웃음으로 한 번에 해결해 주셨다.
"나는 주인공처럼 화장실 청소를 깨끗이 안 했던 것 같아서 반성하게 되더라- (꺄르르)"
같은 영화임에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각자의 기분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점 때문에 인생이 재밌게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