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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디노트 Nov 10. 2021

[Vol. 94] 당신은 추억하는 사람인가요?


2021년 6월, 제주 여행 중 컨셉진을 처음 만났다. <하버 하우스>라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숙소 거실은 이곳이 독립 서점인지, 게스트 하우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진 북 큐레이션이 있었는데, 그중 독보적인 사이즈와 직관적인 표지가 나의 눈을 이끌었다.


그게 바로 컨셉진.



제주 여행 중 만난 컨셉진



컨셉진(Conceptzine) 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한 달 주기로 출간되는 매거진(잡지)이다. 

'이 작은 게 잡지라고?'라는 생각이 들 텐데,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잡지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자고로 잡지라 하면 -(에헴) 

상단 중앙부에 위치한 잡지 이름에 눈이 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표지. 이 세상 핫한 브랜드의 상품은 모두 실렸나 싶은 두께. 그 두께를 최소화하기 위함인지 얇디얇아 가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기게 하는 종이. 광택이 흘러 전등 아래서 읽으면 가끔은 눈이 부시기도 한 질감.


하지만 컨셉진은 한 손으로도 충분히 쥐고 읽을 수 있는 사이즈에, 표지에는 간결한 질문과 그 물음을 연상시키는 사진 한 장이 전부이다. 어찌 보면 간단하고 깔끔해 보이지만, 기획하며 '어떻게 더 줄일까'를 고뇌하는 에디터 분들의 깊은 고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 'Slimplicity is Complexity'가 절로 떠오르는 매체이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컨셉진 2권을 해치웠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영감을 받았다.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정말이다. 


나도 모르게 '크-' 소리를 내게 되는 멋진 표현이 담긴 문장, 나는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둘러보게 하는 질문들까지. 숙소에 컨셉진이 여러 권 비치해 있던 터라 몇 권 더 읽어볼까 싶었지만,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면 멋진 바다를 만날 수 있는 제주에 있었기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멋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뛰쳐나갔다. 그렇게 제주바다의 파도에 내 마음은 뒤덮여 컨셉진의 입지는 썰물처럼 떠내려갔다.



그렇게 여행을 이어나갔고, 셋째 날의 숙소인 성산에 위치한 <클로버 비앤비>였다. 부부께서 운영하시는 숙소인데, 3년 전에 방문했을 때 너무 좋은 추억을 남긴 기억이 있어 다시 한번 찾게 되었다. 워낙 많은 손님이 오는 곳이기에 나를 기억하진 않으시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장님의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체크인 후 객실로 올라갔는데 이게 웬걸



침대 옆 협탁에 또 놓여있는 컨셉진. 

뭐랄까, 혼자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타지에서 동네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도 들고, '너 정말 나 구독 안 할 거야?' 라며 컨셉진이 무언의 협박이 하는 것도 같았다.


책을 살펴보니 88호 컨셉진이 이곳에 비치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주인 부부님의 인터뷰가 실려있었기 때문. 객실에 비치된 여러 소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렇게 또 한 권의 컨셉진을 읽고 88호의 질문에 맞춰 악기를 다루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기타밖에 없어서 상상이 꽤 빨리 끝나버렸지만.





그리고 8월, 나도 컨셉진의 정기 구독자가 되었다.


제주 여행이 끝나고 6월을 보내고 있을 즘, '이번 달의 컨셉진의 질문은 뭐였을까?'라는 생각을 문득 했고, 7월에는 이번 달의 질문이 궁금해서 YES24에 접속해서 컨셉진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8월에는 컨셉진 정기구독을 신청하고 무통장 입금을 했다.


구독 서비스의 홍수에 빠져가는 것 같아 '더 이상의 구독은 안돼!'라는 결심을 했기에 한 두어 달 고민해봤지만, 컨셉진 구독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질문을 해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

다시 말해 우리는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예전의 기억들, 경험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누군가에게 '당신은 추억하는 사람인가요?'는 우리가 안부처럼 묻는 일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추억을 하고 사냐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차라리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더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떠올려보지 못한 나의 모습들을 되돌아보고,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나와 매달 만나게 된 컨셉진. 

10월 호였던 94호의 [당신은 추억하는 사람인가요?]와 함께, 10월 한 달간 '추억하는 사람'으로 살아보았다.



컨셉진의 구성.


책과 롤 플래너, 엽서와 스티커. 그리고 체크리스트와 카드가 들어있는데, 난 이 카드를 명함처럼 지니고 다녔다. 



몇 장 넘기다 보니 나오는 반가운 소품, 라벨기. 고등학교 때였나, '다이모'를 들고 학교를 가면 쉬는 시간마다 내 주변으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벨기에 들어가는 라벨지가 조금 비쌌지만, 허세를 잔뜩 부리며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뽑아주고 점점 줄어드는 라벨지를 보며 조마조마했던 날들. 


그것만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던 날이 이젠 되려 그리운 요즘이다. 



추억 스크랩에는 에디터 분께서 추억이 담긴 책, 물건, 영화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나에게도 추억이 많은 가수 <에피톤 프로젝트>. 이 페이지를 읽으며 오랜만에 <이화동>,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를 들었다.


다른 사람의 추억을 훔쳐보다 보니, 내게 추억이 담긴 물건은 뭐가 있을지 떠올려봤다. 10년이 넘은 시간 동안 보관하고 있는 물건 하나가 생각났다. 단언컨대 이걸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나쁜 일 것이다.



바로 이 나무막대. 이것이 뭐냐 하면


고등학생 시절, 1교시 정규수업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듯 하지만 사실 그건 진정한 시작이 아니었다. 0교시라 불리던 아침 특강이 진짜. 그 뒤로 이어지는, 직장인 스케줄과 맞먹는 7교시의 수업. 또 거기서 끝이 아니다. 보충수업이라는 가면을 쓴 8교시가 숨겨져 있다. 그렇게 하루 수업이 끝이 난다. 그리고 야자시간이 시작된다.


그런 쳇바퀴 같은 삶을 위로해주던 것이 있다.



바로바로 캔디바.

50분간의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10분간의 쉬는 시간에 매점으로 달려가 캔디바를 하나 입에 넣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시원한 소다맛이 나는 껍데기(?)를 깨물면, 달달하고 크리미한 연유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구조. '뽕따'에서 느껴지는 그런 진한 소다맛이 아니라 거기에 물을 탄 듯 가벼운 소다맛이었는데, 그 가벼움은 연유 아이스크림을 두배로 맛있게 먹으라고 그렇게 만든 것 같다. (캔디바 찬양자)


학년이 올라가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며 하루에 소진하는 캔디바의 개수도 늘어갔다. 그렇게 1일 n캔디바를 하는 날이 생기면서, 나는 캔최몇(캔디바 최대 몇 개)를 해보기로 했다.

캔디바를 다 먹은 후 남는 아이스크림 바를 모아 보는 것이다. 거기엔 캔디바를 먹은 날짜와, 그날의 기분도 간단히 메모를 했다.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아서 캔디바를 먹고, 어떤 날은 우울해서 캔디바를 먹고, 어떤 날은 슈퍼를 지나가다 생각나서 먹고. 정말이지 나의 희로애락이 담긴 친구들이었다.


졸업하는 날까지 모아보고 싶었지만, 하도 자주 먹다 보니 순식간에 이만큼이 쌓여 '캔최몇 프로젝트'는 아쉽게 조기 중단했다. 당시 같은 반 친구는 이런 걸 왜 모으냐며 핀잔을 줬지만, 다음 날 본인이 먹은 캔디바 막대를 건네는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학창 시절 중 가장 고되고, 동시에 가장 재밌었던 역설적인 시간에 만든 추억이라 그런지, 이 캔디바 막대들은 버리지 못하고 여태 가지고 있다.


추억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물건을 버리는 것엔 본래 재주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잡동사니가 많은 편인데, 가끔 이상한 바람이 불어 '앞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되겠어!' 하며 먼지 쌓인 물건을 하나, 하나 버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왠지 이 막대기는 쓰레기 통에 넣었다가도 다시 꺼내오게 되는 그런 소품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 유년시절의 하루하루가 스며들어 있기에.



컨셉진 덕분에 서랍에 보관만 하고 있던 캔디바 막대기에 오래된 기억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소한 질문 하나 가 이 나무 막대들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나를 10년 전 그날의 매점으로 떠나게 했다.


언젠간 버려지겠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10년도 훌쩍 넘은 그날의 순간들을 단박에 떠올리게 해주는 소품이 있음에 감사를. 나에겐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나는 그 추억들을 어떤 방법으로 추억하는지 생각해보게 해 준 컨셉진이라는 매체가 있음에 감사를.



나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추억하는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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