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계획을 잠정 중단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계획이었나 보다. 나는 왜 계속 퇴사를 하려 했던 걸까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일을 하기 싫어서는 아니다. 내가 갓 입사한 신입이었을 때 10년을 넘게 근무한 00 사번 선배를 보고 얼마나 무능하면 아직까지 회사에 남아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막상 나도 대기업 취직을 목표로 달려왔으면서 회사에 계속 남아있으면 무능한 사람이고, 회사를 박차고 나가 나만의 사업을 일구어 성공을 해야 진짜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최근 급증한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1인 기업가, 디지털노마드 등등의 성공담을 접하다 보니 괜히 회사에 얌전히 다니고 있는 내가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서도 계속 다른 일을 해볼까 두리번거리면서도 쉽사리 퇴사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왜 이렇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까, 내 가까운 주변에는 이미 세 명이나 퇴사를 했는데 나는 막상 왜 못 그만둘까 스스로도 답답했는데 그동안 내가 회피했던 너무 단순한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던 거다.
무슨 일이든 일장일단이 있는데 나에게는 지금의 회사가, 승무원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이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케줄에 얽매여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자유를 선택할 수 있도록 환경이 변하고 있다. 또한 비록 해외에서 짧은 스테이고 내가 가고 싶은 도시를 선택할 수도 없지만 (거기가 어디든) 어느덧 익숙해진 그곳에서 훌쩍 지하철을 타고 요가를 하거나, 익숙한 식당에 가서 늘 먹던 메뉴를 주문하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핫스팟을 보면 다음에 다시 와보지 하며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
요새 새롭게 재미를 들인 취미인 달리기는 특히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특화된 취미가 아닐까 싶을 만큼 새로운 도시에서 달리기를 하는 재미는 정말 놀라울 정도이다. 시드니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나 저녁을 간단히 먹고 운동화를 신고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달리기를 하다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의 야경이 그 자태를 드러내는 순간 정말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비행을 할 때마다 그곳에서 달리기를 해도 정말 지루하지 않고 비행을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이나 발리에서는 요가를 하고 다른 도시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달리기를 하고, 투어를 하고 싶으면 하고 가끔은 쇼핑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살 수 있는데 대체 왜 그만두지? 또 장점을 유독 부각해서 바라보는 시기가 되었나 보다. (아직은 진급발이 남아있으니 올해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원래 사람 마음이 그렇지. 같은 것을 보고도 그때그때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결정을 내리지. 그래서 가끔은 그때 과감히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퇴사 후에 내 인생이 어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그때 … 만큼 의미 없는 생각은 없으니 여기까지만.
내가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나의 기준이 외부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바로잡았다.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던, 이해할 수 없었던 운동인 달리기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좋아하게 되었다. 책은 무조건 종이책이지 하던 내가 태블릿으로 우연히 책을 보다가 그 편리함에 반해 이북리더기도 구매하게 되었다. 퇴사를 해야 영적인 삶,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꼭 퇴사를 해야지 마음먹고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물 흐르듯이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회사를 떠나게 될 것 같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 지금은 그저 시선을 나에게 머문 채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