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신 5등급, 수능 없이 인서울에 성공한 이야기

”부모님과의 약속이 만든 뿌리“

by 상구의 일기장


내 인생 계획표엔 늘 하나뿐이었다.

아이돌 가수.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그런 내가, 학생회장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책을 폈다.




그 계기는 학생회장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도, 선생님들의 압박 때문도 아니었다.

단 하나,

부모님의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가수를 꿈꾸던 나에게 부모님은 늘 단호했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어디 소속인지도 모를 회사의 연습생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회장이 된 내게 부모님은 처음으로 말했다.


“네가 대학교만 간다면, 너의 꿈을 응원하고 지원해 줄게. 꼭 약속하마.”




부모님의 응원은 내게 절실했다.

그 뜻을 거스르며 무작정 도전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반드시 대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문제는,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느라 사실상 책을 놓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하는 건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2학년 1학기까지의 내신은 8등급이었고, 수능을 대비하는 모의고사는 그저 잠시 눈을 붙이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 상태에서 나의 ‘첫 공부’가 시작됐다.




처음 독서실에 간 날, 나는 1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교과서 첫 장을 펴는데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이렇게 시작해서 진짜 될까?’

마음속에서 자꾸 그런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이미 빼곡히 필기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옆에 있는 친구는 ‘수능 특강’ 책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수능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수는 없었다.

수학과 영어는 중학교 수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연속성이 적고 단기 집중이 가능한 암기 과목 위주로 중간·기말고사를 대비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약속했잖아. 약속했으니까 버텨보자.’




그 시간 동안, 꿈을 향한 도전은 잠시 멈췄다.


다른 친구들처럼 야간 자율학습도 빠지지 않고 밤 10시까지 버텼다.

생전 처음 새벽까지 공부하는 날도 많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던 시절보다는 성적이 분명 올랐다.

하지만 내신은 누적 평균 점수로 매겨지는 탓에, 1학년 때부터 깔아놓은 낮은 성적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3학년 1학기까지, 5등급.

정확히 수시에 반영 가능한 내신은 4.7등급이었다.




입시를 준비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내신 4.7등급으로 수시에 원서를 쓸 수 있는 대학은 거의 없다는 걸.

그리고 고3이 되면 몰랐던 대학교 이름까지 줄줄 외우게 된다는 것도.


그 즈음, ‘입학사정관제’라는 제도가 생겼다.

이 제도는 단순히 성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 면접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전형으로 입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나는 현실적으로 승산이 있는 분야를 찾기 시작했다.

단순한 성적 경쟁으로는 한계가 분명했기에, 내 경험과 강점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분야가 필요했다.


그러다 반장, 부반장, 학생회장 경력이 있는 학생만 지원할 수 있는 리더십 분야를 알게 되었고, 내가 쌓아온 활동들이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임을 확신했다.


단순히 ‘경험을 많이 했다’고 쓰기보다, 각 활동이 어떤 역량과 성장을 보여주는지 논리적 흐름을 잡았다.


학생회 활동은 리더십과 기획력, 춤과 노래 경험은 표현력과 자신감,

학교폭력 극복 경험은 회복탄력성과 인간적 성장을 보여주는 증거로 구성했다.


입학사정관들이 내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 학생이 왜 이 학교에 와야 하는지”를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단순히 성적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능성과 성장을 보여줄 수 있는 활동들을 찾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지역 내 학생회 네트워크 형성이었다.


“용인시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을 창설했다.

교내에만 머무는 학생회장이 아닌, 외부와도 소통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인 시내 고등학교 학생회장들에게 직접 연락했고, 약 10개 학교가 연합을 이루었다.




첫 모임 날, 카페 구석에 빙 둘러앉았다.

다들 어색하게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진짜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우리도 학교로 돌아가면 ‘학생회장’이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한 가지쯤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모임은 단순한 친목이 아니었다.

각 학교에서 진행 중인 활동을 공유하고,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학교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열여덟의 어린 나이였기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지만, 그 순수한 열정은 대단했다.

게다가 우리가 1기였기에, 단체의 목적과 틀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양한 시도를 했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수능 연합 응원”이다.


그 시절엔 수능 당일, 학생회 소속 친구들이 새벽부터 고사장으로 지정된 학교 앞에 나가 선배들을 응원하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메인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밤새 경쟁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학교와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춥고 피곤한 새벽, 응원을 위한 자리 싸움은 정말 비효율적이었다.


우리는 이를 해결하고자 연합 응원을 기획했다.




아침 6시.

우리는 다 같이 손난로를 쥔 채 줄을 맞춰 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친구가 말했다.

“와, 이렇게 같이 응원하니 진짜 뿌듯하다.”


그 말에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응원은 처음으로 ‘갈등 없는 수능 응원’으로 기록됐다.

함께 웃으며 진심만 담긴 따뜻한 응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나는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학생회장이 되고 전국의 학생회장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대한학생회”라는 전국 규모의 조직을 알게 되었다.


면접을 보고 합격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에 응해 입회했다.


내가 만든 단체가 아닌, 이미 체계가 갖춰진 곳에서 활동하니 배울 점이 많았다.

토론회를 열고 역사를 되새기는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며, 리더십과 기획력을 키웠다.


이 외에도 기회가 되는 대회나 활동은 가리지 않고 참여했다.




그리고 그동안 해왔던 모든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꺼내 적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활동, 8등급에서 5등급까지 끌어올린 성장의 과정,

춤과 노래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순간들,

그리고 학교 폭력을 견디며 리더가 된 내 이야기까지.


나의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수시 서류 준비는 결코 쉽지 않았다.

입학사정관제도, 결국은 성적이 바탕이었다.

5등급으로 수시라니, 나도 스스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눈이 높았다.

내가 들어본 학교만 가고 싶었다.

또한 수능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능 최저가 있는 학교는 애초에 제외해야 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버팀목이었던 것 같다.




나는 11곳에 수시 원서를 냈다.

그때는 수시 원서 제한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상향’, ‘상향’, 또 ‘상향’뿐이었다.

‘안정 지원’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원서마다 추천서를 써주셨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2학년, 3학년 내내 나의 담임이셨고,

학생회장에 도전할 때부터 원서를 쓸 때까지 늘 용기와 응원을 주셨다.




그렇게 수시 접수를 마친 결과, 단 세 곳만 서류에 합격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붙은 학교보다 더 낮은 등급의 학교는 떨어지기도 했다.


기준이 달랐던 걸까, 운이 좋았던 걸까.




다음 단계인 면접을 준비했다.


면접을 준비하는 며칠 동안은 책상 앞에 앉아만 있었다.


종이에 적어둔 예상 질문을 몇 번씩 소리 내어 읽다가도,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내가 아무리 답을 잘 해도 성적에서 밀리면 끝 아니야?’

그래도 매일 거울을 보며 스스로 연습했다.


“왜 이 학과를 지원했나요?”

“리더십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최대한 솔직하고 진실하게 나를 보여주려 노력했다.




결과 발표.

탈락. 또 탈락.


이제 단 한 곳만 남았다.


남은 한 곳은 서울에 위치한, 내가 쓴 원서 중 가장 상향에 속하는 곳이었다.


기대는 접었다.

오히려 면접을 가장 잘 봤다 생각한 학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발표일 당일 아침.

핸드폰만 쥐고 있었다.


발표 안내 문자를 받고 몇 번이나 새로 고침을 눌렀지만, 서버는 느리기만 했다.

다른 학교에서 떨어졌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이번엔 그냥… 미리 체념하자.’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며 마지막으로 화면을 눌렀다.




‘합격’ 두 글자가 떴다.


손이 덜덜 떨렸다.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진짜야? 진짜 된 거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믿기지 않았다.

그 성적으로, 그 학교에. 누가 봐도 기적이었다.




그날 저녁, 부모님께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 아빠 나 됐어! 붙었어!”


부모님은 전화를 끊지 못하고 한참 우셨다.

학생회장 당선에 이은 두 번째 효도였던 것 같다.




나중에 나를 면접 봤던 교수님께 여쭤봤다.

왜 나를 뽑으셨는지.


그분은 말씀하셨다.


“학교폭력을 겪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학생회장이 된 너의 모습이 인상 깊었어. 안 뽑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나는 수능을 보지 않고, 내신 5등급으로 인서울 대학교에 진학했다.


몇 년이 지나 들은 이야기인데, 내 이야기가 ‘모교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수능 없이, 내신 5등급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 학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과 간절한 마음, 내 특유의 집착과 끈기.


무엇보다 담임선생님의 믿음과 부모님과의 약속이 내게 이런 기적을 만들어주었다.




결국 나는 그 약속을 지켰고,

며칠 후 조심스레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학원 가도 돼?”


엄마는 대답 대신,

한참을 웃으셨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꿈을 향해 나아가도 된다는 걸.




지금, 서른넷의 내가 돌아보면 그때 부모님의 말씀—

‘대학교에 가면 너의 꿈을 응원하겠다’는 그 약속은,


실패를 견디게 했고,

또 다른 길을 열어준, 놀라운 선견지명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그렇게,

결국 나를 살게 했다.


작은 약속 하나가 내 삶의 뿌리가 되었고,

그 뿌리 위에서 나는

마침내 ‘진짜 꿈’을 향한 도약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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