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밖에서 찾은 나의 첫 번째 승리”
고등학교 2학년, 내 10대 시절 중 가장 큰 이벤트가 있었다.
아이돌을 꿈꾸며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남들 앞에 서는 것과 말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 과정에서 더 단단해지고 싶었다.
요즘 말로는 ‘관종’이었을까? 사실, 그런 성향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다.
초등학생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전교를 대표하는 학생”이라는 말에 혹해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아 선거 포스터를 손수 만들었고, 프로필 사진은 당시 유행하던 ‘하두리’ 캠으로 찍어 출력해 붙였다.
그때 기억나는 건,
당시 교장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학교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내 선거 포스터 사진을 보며,
“이게 무슨 사진이야?”라고 하셨던 장면이다.
그럴만하다.
다른 후보들은 사진관에서 정식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나는 하두리 사진인 만큼 사진에 이모지들이 마구마구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얼짱카페 지원 사진처럼..^^)
나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의 당황스러움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너무 튄 건가… 근데 뭐 어때. 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볼래.’
그때는 철없던 용기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하두리 사진, 차라리 내보내지 말 걸 그랬다. 하하.
다른 후보들이 부모님과 함께 간식도 돌리며 선거운동을 벌일 때 나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냥 나 홀로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
하지만 그때 크게 상처받거나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나는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선도부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학생회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학기 말, 총학생회장 선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학생회장에 당선 돼보겠다고.
그 결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겪으면서 우리 가족은 함께 아파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부모님은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늘 불안해하셨다.
학생회장이 되어 “잘 극복했고,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더 나아가 학생들을 대표하는 일도 맡고 있어요!”라고 보여드리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나의 변하지 않은 꿈 때문이었다.
아이돌을 꿈꾸는 나에게 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은 여러모로 의미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경험은 분명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테고, 언변 능력이나 태도 또한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가수 이승기도 학생회장 출신이었고, 그런 이력이 매스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걸 보며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경력 한 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회장을 할 정도면 남들 앞에서 떨지 않겠구나’, ‘인기 있는 친구일 수도 있겠다’—그런 인식을 노렸다.
더불어 추후 예능이나 인터뷰 등에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거나 나를 한번 더 노출시킬 수 있는 꼬리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굳히고 출마 신청서를 작성했다.
고등학교에서 소중한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 선거운동원으로 함께했고, 선도부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선후배들도 나를 응원해 줬다.
하지만 내 앞엔 분명한 장애물도 있었다.
첫 번째는 경쟁자였다.
초등학교 때 나를 꺾었던 친구가 고등학교에서도 다시 후보로 나섰다.
어릴 때부터 인기 많고, 인맥도 넓은 친구였다.
주위에서는 “당연히 그 친구가 될 거야”라는 분위기였다.
두 번째는 내가 선도부로서 규칙을 엄격히 지켰던 과거였다.
나는 매일 아침 정문 앞에서 복장 위반 학생들을 단속했다.
‘선도부 세모눈’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그런 내가 후보로 나선 상황에서, 나로 인해 벌점을 받았던 친구들의 표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세 번째는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다른 학교로 간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내 친구들에게 “이상구 뽑지 마”라고 네이트온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친구가 말했다.
“야, 나 네이트온 켰는데 걔네가 너 찍지 말라고 하더라.”
“진짜? 그걸 왜 굳이…”
“상구야 괜찮아?”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신경 안 쓸래. 내 할 일 하면 돼.”
다른 학교에 다니면서까지 나를 떨어뜨리려는 집착은, 예상하지 못한 한 방이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묻어두었던 기억과 트라우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이겨내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네 번째는 내 성적과 배경이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들도 아니었다.
선생님들도 다른 후보를 더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나는 내 방식대로,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꾸준히 인사하며 내 진심을 전했다.
매주 오디션에 빠짐없이 갔던 것처럼, 선거운동도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빠짐없이 이어갔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같은 열정으로 나 자신을 홍보했다.
특히 “90도 인사”는 나의 상징이 되었다.
단순한 인사일지 몰라도, 그 자세 속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나의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나와 선거운동원들은 신인 아이돌처럼 늘 당차고 밝게 인사했다.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지나가다 웃으며 말했다.
“쟤네는 학생회장 선거가 아니라 아이돌 데뷔하는 줄 알겠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조금은 노린 효과였으니까.
또한 나의 끼를 활용했다.
학생회장은 모범생의 전유물일까?
많은 학우들과 소통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마다 들어가 인사할 때면,
“여기는 나의 무대다”라고 생각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2세대 아이돌들의 춤이나 인기곡들을 준비해 보여주기도 했다.
학우들이 나를 즐겁게 기억하길 바랐고, 실제로도 긍정적인 인상이 많이 심어졌다.
어느 반에서는 내가 춤을 추자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와, 얘 학생회장 되면 재밌겠다!”
그때의 그 함성은 내가 외톨이로 지냈던 중학교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를 조금은 밀어냈다.
선거운동은 일주일이 넘게 이어졌고, 드디어 투표 당일이 다가왔다.
투표 당일 아침, 평소보다 등굣길이 묘하게 정적이었다.
친구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괜히 더 의식됐다.
‘어쩌면 오늘로 모든 게 달라질지도 몰라.’
나는 교문 앞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조심스레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지만, 솔직히 기대는 크지 않았다.
경쟁자들의 조건은 훨씬 좋았고,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 나를 꺾었던 그 친구의 당선을 점쳤기 때문이다.
투표 마감 후 늦은 저녁, 후보들과 선거관리위원회가 회의실에 모여 개표를 지켜봤다.
나는 눈을 감고 빌었다.
‘제발, 이번에는 당선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후회하지 말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내가 당선되었다.
게다가 2위와의 표 차이는 무려 200표 이상이었다.
아슬아슬한 승리가 아니라, 압도적인 지지였다.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회의실 안이 술렁였다.
“야 너 됐어!!”
“와 200표 차이야!!”
친구들의 환호가 쏟아졌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순간,
오디션 탈락만 경험했던 과거의 나, 학교폭력을 견뎌냈던 나, 학생회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온 나—그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시절 패배했던 상대와의 재경합, 학교폭력 피해자의 흔적, 부족한 성적, 학교 영향력 없는 부모님, 부정적인 선도부 이미지…
그 모든 불리함 속에서도 내 진심은 학우들에게 닿았다.
오히려
“쟤가 선도부 활동하는 것만 봐도 알겠어. 학생회장이 되어도 열심히 할 거야.”
라고 생각하며 나를 선택해 준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부모님께도 당선 소식을 전했다.
“엄마, 아빠… 나 됐어. 학생회장 됐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손으로 입을 막으셨다.
“정말이니? 우리 아들이…”
아버지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시다가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고생했다, 우리 아들.”
그 토닥임은 그동안 우리 가족이 학교 폭력을 함께 견뎌온 시간에 대한 위로였다.
그 후, 출마 신청서에 담았던 그 열정보다 더한 마음으로 1년간 학생회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왕따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이었다.
고등학교에도 여전히 외톨이 친구들은 있었고, 나는 그 친구들의 친구가 되어주려 노력했다.
때로는 상황이 비슷한 친구들을 연결시켜 주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거창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나 자신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한 전교생의 목소리를 듣는 활동에도 힘썼다.
교내 곳곳에 ‘소리함’을 설치해 매주 의견을 수렴했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복 디자인 변경이었다.
당시 학교 교복은 짙은 초록색이었고, 용인 시내에서는 ‘메뚜기 교복’으로 불리며 놀림을 받았다.
나는 많은 학생들의 요구를 모아 학교에 전달했고,
마침 시기도 잘 맞아 디자인이 성공적으로 변경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배들에게 더 멋진 교복을 선물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기 한 달 전, 어느 식사 자리에서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분과 나의 고등학교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학교 이름을 말하자, 그분은 말했다.
“아! 거기 교복 예쁜 데잖아요.”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한마디는 내게 큰 뿌듯함으로 남아 있다.
크고 작은 일들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뛰었던 1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안 하던 공부’를 갑자기 시작하게 되었다.
왜였을까?
공부는 내 인생 계획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