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텨서 만드는 사람”
나는 아이돌 가수의 원석이었을까?
그저 평범한 돌멩이었을까?
처음에는 그저 희망 하나만으로 시작한 도전이었다.
첫 오디션에서 받은 작은 가능성이 자꾸 마음을 붙잡았고,
매주 토요일마다 다시 길을 나서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나는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게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도.
그래도 이상하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려 한다.
17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처음으로 평범한 교실에 앉아
평범한 아이들과 웃을 수 있었다.
중학교 때 따돌림을 시켰던 그 애들과는 다른 학교로 진학했고,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꿈도 혼자서만 꾸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교내 댄스 동아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오디션을 거쳐 그 동아리의 일원이 되었다.
혼자서 안무를 짜고 춤을 추던 내가
이제는 용인에서 춤을 꽤 잘 춘다는 선배들에게 안무를 배우고,
춤에 필요한 기본기를 체계적으로 익히며
점차 실력을 키워나갔다.
함께 하니 훨씬 재미있고 즐거웠다.
아이돌 가수도 솔로가 아니라 팀으로 무대를 꾸미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동아리 내 남자는 나와 다른 한 친구뿐이라 청일점이었고,
처음엔 쭈뼛쭈뼛했지만
서로 앞에서 춤을 추고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자연스레 성장할 수 있었다.
그해 나는 용인에서 유명한 ‘청소년 춤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여러 중고등학교에서 춤과 노래를 준비해 출전하는 이 대회는
지역 내 전통이 깊었고,
예선 통과도 쉽지 않았다.
본선에 오른 20팀 역시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치열하게 올라왔다.
우리 댄스 동아리는 혼성곡인 ‘빅뱅의 스트롱 베이비’를 준비하여 본선에 진출했다.
연습실이 없어 우리를 비출 수 있는 유리문 앞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밤늦게까지 연습했고, 주말까지도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본선 진출도 기뻤는데... 1등! 대상이라니!
수상 후, 상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뛴 경연, 내가 받은 대상.
부모님께 그걸 처음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엄마 아빠, 나 대회에서 대상 탔어.”
아버지는 상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이거 진짜 네가 한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으셨다.
“잘했네…”
처음으로 들은 ‘잘했다’는 말.
아버지의 칭찬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했던 건,
그날 무대에서 느꼈던 짜릿함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좋아하는 춤을 추고,
또 무대에서 인정을 받는 감정은 처음이었다.
100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대를 선 것도 처음이었다.
무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
나를 향해 쏟아지던 조명.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 맛에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구나.’
유리문 앞에서 연습하던 마지막 밤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렇게 춤추는 나를,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보고 싶어해줄까?’
그 질문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다.
그 뒤로는 오디션장의 불빛이 더 간절해졌다.
중학생 때부터 이어온 ‘혼자만의 도전’,
즉 기획사에 지원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중학교 때 처음 도전했던 SM 오디션에서는 주장원이 되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다시 그 자리에 올라 경쟁자를 제치고 주장원이 되기도 했다.
주장원이 되고 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탈락은 여전히 탈락이었다.
‘내가 너무 한 곳만 바라봤나?’
그때 처음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기회는 많은데,
내가 좁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서.
‘한 우물만 파지 말자.’
그렇게 나는 SM이라는 큰 회사뿐 아니라,
JYP, YG, DSP 같은 주요 기획사부터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은 기획사까지,
데뷔할 수만 있다면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다양한 기획사에 지원하면서 나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할 수 있는 건,
그저 계속 시도하고 배워가는 일이었다.
⸻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반대는 늘 벽처럼 있었다.
처음 오디션을 다닐 땐 부모님 몰래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는 금세 눈치채셨고,
처음엔 “조심히만 다녀라” 하셨지만,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으로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신 이후로는,
더 이상 내가 ‘남들보다 튀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셨다.
‘학교폭력도 당하지 않고, 평범하게 공부하며 살아가는 아이.’
그게 부모님이 원하신 길이었다.
그래서 학원을 보내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었고,
내가 몰래 아르바이트해서 서울의 학원을 등록하는 것조차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나도 부모님을 이해했기 때문에,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혼자 연습하고, 기획사 지원을 계속 이어가는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점점 더 집요하게 움직였다.
방법도 다양했다.
직접 찾아가는 공개 오디션,
영상 촬영 후 이메일·우편 접수,
오디션 정보 수집, 지원서 작성…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나는 늘 그 일들에 매달려 있었다.
고1이 끝날 무렵, 정리해 보니
탈락한 오디션만 거의 100번이었다.
‘합격’이라는 단어에 너무 목말라서, 그 두 글자가 내 삶의 유일한 답처럼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그 100번이란 숫자는 단순히 ‘지원’만 한 게 아니라,
찾아가고, 준비하고, 촬영하고, 수정하고…
공들인 시간과 에너지가 켜켜이 쌓인 도전의 기록이었다.
하나도 대충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번이 전력투구였다.
⸻
물론, 그런 날도 있었다.
휴대폰만 붙잡고 합격 연락을 기다리는 날.
탈락은 메일로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는 쪽에서 조용히 포기하는 것.
그게 오디션의 룰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지원서도 쓰지 못하고,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혹시 이번에도 떨어졌나?’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됐다.
‘아, 이번에도 끝났구나.’
오디션장에서 내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버린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가 지나면 또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또 한 번 시도했다.
그저 간절함 하나로
나는 ‘노크 머신’이 되어 있었다.
⸻
또 이런 도전의 과정이
매끄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번엔 진짜 데뷔 시켜준다.”
어느 회사의 대표님은 최종 오디션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수십 번 떨어져도,
그래도 언젠가는 될 거라고 믿고 달려왔던 나였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합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진짜 끝났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온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렇게 덧붙였다.
“데뷔 준비비용이 조금 필요해. 이건 회사 규정이라 어쩔 수 없어.”
돈이 없던 중학생.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아빠, 진짜로 이번에 데뷔가 결정됐어.”
“근데 회사 규정상, 녹음비를 먼저 내야 한다고 해.
이건 진짜야. 이번만 도와줘.”
아버지는 조용히 듣고 계셨다.
그리고 며칠 뒤, 전달받은 계좌에 그 돈을 넣어주셨다.
‘이제 됐다. 드디어 나도 데뷔하는구나.’
내가 꿈꿨던 무대, 조명, 환호성,
그게 이제 내 차례라고 믿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문자를 보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회사의 이름도, 그 사람의 번호도 사라졌다.
‘엔터 사기’였다.
어쩌면 아버지도 알고 계셨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고도 아무 말 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그 후 부모님과 평소처럼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나는 아버지 옆에서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밥숟가락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내 입에서는 “회사에서 연락 안 와.“라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꿈도, 사기도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는 걸.
내가 그토록 꿈꾸던 데뷔가,
현실에서는 상처로 다가오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참 재능이 없었던 것 같다.
학원을 다니면 실력이 는다고 해도,
오디션 합격을 보장하진 않는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보통 기획사는 ‘원석을 찾아서 키운다’고 하지만,
나는 그 ‘원석’에 들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냥 돌멩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멩이도 계속 깎으면 언젠간 모양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깎이고, 다듬어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100번의 탈락.
돌이켜보면, 그것은 실패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내가 끝까지 버텨낸 시간의 기록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실패를 견디는 법,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믿는 힘을 배웠다.
그러니 후회는 없다.
나는 어쩌면, 영원히 원석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돌멩이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걸,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이번엔 오디션장이 아닌,
다른 세상 속에서 ‘시험대’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