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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오는가

어느 정도 완성된 글과 책 컨셉을 들고 여러 출판사들에게 어필했던 결과는

by Angela B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어 속담 표현 중에는 El que nace para martillo, del cielo le caen los clavos 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자면 "망치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못을 내려준다"라는 뜻이나, 함의를 풀어보자면 '사람들은 각자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한 방법이나 수단들을 자연스럽게 찾게 되면서 자신이 가진 운명을 저절로 발휘하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사람이 가진 운명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의미심장한 운명론적 속담인 것이다. (멕시코 스페인어에서는 El que nace para tamal, del cielo le caen las hojas, 즉 "타말이 되도록 태어난 사람은 하늘에서 이파리를 내려준다"라는 식으로 재밌게 표현한다고 한다.)



참고로 타말은 옥수수 반죽을 쪄서 잎에 싼 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의 전통 음식으로, 대략 이렇게 생겼다.



위에 언급한 속담처럼 내가 마음 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니, 이제는 하늘이 나의 편이 되어 돕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게 의외로 내 주변 지인 중에는 이미 책을 출판해 봤거나, 지금 출판 준비를 하고 있거나, 혹은 출판 직전인 사람 등이 꽤 있었다. 그분들을 통해 내 결심을 전하니 생각지도 못하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귀중한 조언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현 출판 시장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함께 실제적으로 어떻게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지 구체적인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출판 시 가장 중요한 건 마케팅과도 연결될 책의 컨셉과 매력적인 글 내용이고, 출판사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나만의 독보적인 개성과 컨셉을 유지하고 싶다면 적어도 초고의 70퍼센트 이상을 쓴 뒤에 출판사에 투고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렇게 현생 속에서 시간을 쪼개가며 정신없이 초고를 70퍼센트 가까이 완성해가던 것이 2024년 작년 한 해 말 였다.


학기를 모두 마친 12월 중순, 파견 막바지까지 수고가 많았던 나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다. 바로 출판사에게 그동안 완성된 내 원고를 투고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쓴 출판 원고를 바탕으로 출판기획서를 써 내려가고, 인터넷에서 하나씩 추려놓은 출판사의 정보를 토대로 출판기획서와 샘플 원고를 첨부파일로 넣어 투고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항으로 떠나기 전까지 밤을 꼬박 새워 대략 열몇군데의 출판사에 하나하나 모두 메일을 보낸 뒤 맥이 탁 풀린 채 긴 한숨을 쉬고 나서야 나는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내가 PPT로 작성했던 출판 기획서의 일부 발췌


각 출판사에게 원고 투고용으로 보낸 샘플 중 일부 모음




어차피 12시간 이상의 시차가 있는데다 답이 금방 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 당분간은 출판사 답변에 대해서는 잊자고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이나마 내 여행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니 메일함에도 답이 왔는데, "귀하의 원고 방향은 본 출판사와는 맞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거절의 메일을 받기도 했고, 어떤 건 "출판사 부담에 자가부담을 반씩 해서 출판하자"고 적혀 있지만 결국 나더러 돈을 들여 자비출판을 하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럴거면 아예 처음부터 독립출판을 고려했겠지 이 양반아' 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으나 그럴 마음조차 드는게 피곤해서 메일을 지웠다.


그러더니 그 다음 날에는 미다스북스라는 출판사로부터 온 메일을 읽었는데, 내가 보낸 기획서와 샘플 원고를 정말 진심을 다해 꼼꼼하게 다 읽어봤구나 싶을 정도로 진중한 피드백이 항목별로 가득 들어있었다. 그 당시 칠레 이스터 섬에 있던 나는 진지한 피드백을 받고 감동해서 그때 같이 있었던 호스텔 친구와의 당일 오후 여행 일정도 포기하고 내내 이메일에 붙들려서 길게 답장을 적었다. (어쩌면 사실은 그 메일에 적혀 있었던, 처음 받아본 "작가"라는 호칭에 저절로 으악 소리를 지르며 감격한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 출판사와 "미래에 나올 내 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일단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데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처음 내 작품을 내놓는 사람이기에 뭐든 덜컥 진행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기분으로, 한국에 들어가서야 실제로 대면으로 만나 계약을 성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나 역시 2월 중순에는 모든 파견 계약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가니 귀국 이후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출판사로부터 담당자의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나머지 여행 중에도 짬을 내어 조금씩 글을 완성해가며 90퍼센트 이상 초고를 작성했지만, 파견 막바지에는 아르헨티나로 가족들이 여행 오는 바람에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결국 전체 완성은 못했다. 시간 관계상 나머지는 한국에 가서 하리라 결정하고 남은 시간 동안 짐을 정리하고 귀국 준비를 했다.


아르헨티나를 떠나고 중간 경유지인 캐나다로 향하는 날. 이미 3년간 지내면서 정이 많이 든 이 나라, 이 대륙을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려와 눈물은 고여있었지만, 정작 귀국 짐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 늘 그렇듯 헐레벌떡 비행기에 올라 선반 위에 짐들을 가득 우겨 넣고 자리에 앉으며 마무리.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행을 시작했다. 두둥실 떠오르는 비행기와 함께 이젠 옆자리에서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가 들리며 내가 이곳을 멀리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떠남'이 전제하는 새로운 '출발'의 선상에 놓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본능적으로, 이 긴 귀국이 지나면 내 인생의 궤도 역시 조금 달라질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보너스 컷, 칠레 이스터섬. 내겐 출판사의 연락을 받았던 기념비적인 장소이자, 전세계에서 모인 좋은 사람들과 예쁜 풍경 아래서 좋은 기억들만 가득한 인생 여행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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