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유적지 방문부터 태양을 기리며 사기를 당한 인티 라이미 축제까지
잉카 제국의 전설에 따르면 - 태양신 인티는 자신의 자녀인 망코 카팍과 마마 오클로에게 빛나는 황금 지팡이를 건네주며, 이 황금 지팡이가 스며들 땅이 새로운 태양제국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다.
그래서 두 남매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그들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황금 지팡이가 스며들 땅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험준한 안데스 고원을 헤치며 걷다가, 드디어 장엄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계곡에 다다랐다.
망코 카팍이 그 계곡에 황금 지팡이를 꽂자, 황금 지팡이가 부드럽게 땅속으로 사라졌고 그 순간, 두 남매는 긴 여행이 끝나고 드디어 약속된 땅에 이르렀음을 확신했다.
황금 지팡이가 깃든 땅은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의 “쿠스코”로 다시 탄생했고, 태양신의 후손들이 태양을 섬기는 나라, 잉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인 전설을 품은 옛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오늘날에도 페루에서 반드시 가야 할 관광지로 손꼽히며,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태양의 도시’라는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해발 3300미터에 위치하여 고산지대 특유의 강렬한 해가 내리쬐는 이 역사적인 장소는 특히 6월부터 9월 사이 건기가 여행의 최적기다(물론 누구라도 올 수 있는 고약한 고산병도 덤이다.).
만약 사람들이 페루에서 단 한 군데만 갈 수 있다면 어디를 가야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쿠스코를 꼽았다. 페루를 상징하는 마추픽추 Machu Picchu 부터 오얀타이탐보 Ollantaytambo, 코리칸차 Coricancha, 삭사이와만 Saqsaywaman, 12각 돌, 피삭 Pisac 등 다양한 잉카 유적지부터 태양절 축제인 인티 라이미 Inti Raymi, 주변 마을마다 다채로운 전통과 풍경을 자랑하는 등 풍부한 문화까지 모두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계절에도 빛을 머금은 찬란한 도시인 쿠스코를 나는 페루의 6-7월 연휴에 맞춰 두 번 방문하였는데, 책에서만 보던 유적지들을 만나는 진한 감동 뿐만 아니라, 관광지로 이름난 곳에서 겪을 수 있는 씁쓸하고 허탈한 사기의 추억까지 함께 얻게 되었다.
활기차고 번화한 쿠스코 시내를 살짝 벗어나면 태양신 인티를 모시던 가장 성스러운 신전, 코리칸차 Coricancha 가 있다. 그만큼 잉카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신전이었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잉카 제국이 멸망당한 이후 산토도밍고 성당이라는 종교 건물로 개축되었다. 몇 번의 큰 지진을 거치면서 산토도밍고 성당은 무너지고 부서졌으나, 정작 잉카인들이 돌로 만든 기단은 견고하게 남아있어 잉카 문명의 뛰어난 석조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잉카인들의 돌 덕후 면모는 도시와 도시 주변 다양한 유적지를 둘러싼 돌들과 성곽에서 뚜렷하게 보인다. 당대의 기술로 어떻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돌들을 깎고, 바퀴도 없이 이렇게 큰 돌을 움직이고 쌓았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라고 한다.
잉카의 수준 높은 석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적지 투어를 열심히 돌고 나서, 나는 쿠스코에서 기차를 타고 오얀타이탐보를 지나 마추픽추로 향했다.
보통 마추픽추에 가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산 트레킹, 다른 하나는 기차다. 트레킹 코스는 잉카 트레일을 비롯해 일수와 경로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며, 체력과 일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처음엔 나 역시 이를 도전해볼까 고민했지만, 파견 초기 아레키파 근교의 콜카 캐니언에서 겪었던 고산병 경험으로 인해, 고산 트레킹은 내 몸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결국 트레킹은 단념하고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마추픽추행 기차는 관광객용과 현지인용이 따로 있다. 관광객용은 달러로 결제할 만큼 비싸고, 열차 내부도 마치 유리 온실처럼 전면이 개방되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반면 현지인용 기차는 가격이 관광객용의 5분의 1, 아니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금 차이로 인해 외국인은 현지인 기차 탑승이 금지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여행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물론 일부 여행자들은 현지인 신분으로 위장하거나, 친구 도움을 받아 편법으로 탑승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러기는 싫어서 정석대로 쿠스코에서 오얀타이탐보로 이동한 다음 관광객용 기차를 타고 - 다시 마추픽추의 아래 마을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Aguas Calientes 로 향했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보통 꼭두새벽에 일어나 마을에서 출발하는 마추픽추행 버스를 타고 올라가면 된다. (물론, 마을에서부터 마추픽추로 직접 올라가는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내가 페루에 가기로 결정이 났을 때부터 너무나도 가 보고 싶었던, 오래 전 내가 초등학교 시절 선물 받은 세계의 역사와 지리 책에 쓰여있던, 그 때부터 쭉 나의 버킷리스트였던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잃어버린 공중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해발 2,430m의 고도에 자리 잡은 이 유적은 실제로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1911년, 미국 탐험가 하이럼 빙엄에 의해 ‘재발견’되었다는 이곳은 사실 그 전부터 인근 주민들에게는 잘 알려진 장소였다고 한다.
마추픽추는 잉카 문명의 정수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소다. 완벽하게 맞물리는 석조 구조물 등이 극대화된 장소, 농사를 위한 계단식 밭, 천문학적 지식이 깃든 해시계 용도의 인티와타나 Intihuatana 등은 이곳이 단순한 유적이 아닌 종교적·정치적·농업적 기능을 함께 지닌 복합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유적지인 마추픽추는 이토록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데, "스페인 정복 이후 잉카인들의 마지막 항거지"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부터 "외계인이 세웠다"같이 다소 황당무계한(...) 이론까지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본 여러 역사 다큐멘터리들을 종합해 봤을 때 잉카 황제의 휴양지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 같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마추픽추 유적지를 차근차근 둘러보며 폰에 담아온 El condor pasa 노래를 들었다.
당시 길게 이어진 줄 이어폰을 귀에 끼우고 느릿한 리듬으로 가사를 따라부르니, 마치 잉카인의 얼이 바람의 형태로 내게로 다가와 닿는 듯 했다. 오래전 그들이 바라보았을 산맥과 하늘을 나 역시 바라보며, 그 순간만큼은 시공간의 경계를 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외에 둘러볼 만 한 곳으로 해발 3000m 이상에 위치 살리네라스 Salineras 염전과 마라스 Maras 마을이 있다. 아주 오래 전에는 바다였던 이곳이 지각 변동으로 인해 융기하며, 산 속의 염전이 되었다고 한다. 잉카 시대 이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암염을 캐내왔으며, 지금도 대를 이어 염전업에 종사하고 있단다.
안데스 산맥 깊은 골짜기, 따가운 남미의 햇볕 아래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사람들이 캐낸 살리네라스의 소금은 인근 국가에도 소문이 날 만큼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함께 투어를 온 브라질 아주머니들이 "이 소금으로 요리하고 밥맛이 다르다"며 몇 봉지씩 사가는 걸 보았고, 직원들에게 관절염이나 류마티스 증상에 좋은 소금도 따로 추천받았다. 나 역시 이들의 영업에 혹해서 몇 봉지 사갔는데, 실제로 요리를 해보 과연 국물맛이 더 깔끔한 느낌이 들며 깊은 풍미가 났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금을 들고 한국에 돌아가는 길에, 나를 마약상으로 오해한 미국 세관에 걸려 호되게 고생을 했던 일도 있었다. 이런!)
한 번은 인티 라이미 Inti Raymi, 즉 태양절 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쿠스코를 방문한 적이 있다.
태양의 신 인티를 기리는 이 전통 의식은 원래 잉카 제국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최대의 축제였으나 스페인 침략 이후 금지되었다. 이후 1940년대에 다시 부활하여 해마다 6월 24일(북반구에서는 하지이나, 남반구에서는 동지에 해당한다)에 성대하게 재현되며, 수만명의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몰려드는 대규모 행사로 성장했다.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갖가지 문화행사가 연이어 있는 이 시기에는 쿠스코 전체가 마치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다. 갖가지 전통 복식을 한 사람들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꾸준히 행진하고, 다양한 음악과 춤, 연극이 함께 어우러지며, 쿠스코 시내 중심의 아르마스 광장은 화려한 퍼레이드와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축제 기간 속, 거리 곳곳을 수놓은 화려한 복장과 색채에 나까지 압도될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쿠스코는 그렇게 내게 태양처럼 밝은 에너지를 주는 듯하다가, 깊이 실망스럽게 만든 사건도 함께 제공했다.
나는 페루를 떠나기 전, 인티 라이미 축제를 꼭 보고 싶었기에 이미 한 달 전쯤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대로 파는 티켓을 샀었다. (이곳은 특히 관광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가짜 표도 많기 때문에 정부 승인 마크가 있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무대 가장 가까이 있는 VIP 좌석은 몇백달러나 했기에 내 형편으로 선뜻 사기는 어려웠고, 대신 저렴한 입석이 있기에 입석 티켓을 샀다. 당시 같은 숙소에 있던 사람들도 비슷한 경로로 입석을 구입해서 다같이 가기로 했었다.
삭사이와만에서 본 행사가 열리기 전에 아르마스 광장에서도 간단한 의식을 보여주었는데, 댄서들과 배우들이 보여주는 박력있는 춤사위와 강렬한 모습에 - 저걸 실제로 보면 얼마나 멋질까 가슴이 두근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었다.
행사 당일, 나는 일찍이 나섰으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나는 표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라인 밖으로 쫓겨났고, 제대로 의식을 보지도 못했다.
표를 검사하러 다니는 사람도 없고, 케추아말을 쓰며 새치기하는 가족들은 잡지도 못하는 등 입장줄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입석'이라고 적혀 있는 안쪽 구역으로 들어가려 하자, 내게 “입장 불가예요. 지금 공간이 없어서 못 들어가요." 라며 직원 하나가 나를 밀어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그럼 왜 입석을 팔았나요?"라고 물어봤지만, 직원은 당황한건지 짜증이 난건지 내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가버렸다. 결국 나는 멀찌감치 거리에서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겨우 축제의 일부분만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치이고, 돈은 썼는데 들어가보지도 못했지, 의식은 볼 수도 없었지.
언덕에서 저 너머로 어느 정도 안간힘을 쓰면서 보다가, 결국 인티 라이미가 끝나기도 전에 완전 엉망이 된 기분으로 일찍 돌아왔다.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일을 당해 밀려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모두 이 상황에 분개하여, "이딴 나라에는 다시는 안 온다"며 욕에 욕을 하고 차갑게 떠났다.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내일 항의 전화하겠다며 난리였다. 나 역시 티켓 대행사 홈페이지 이메일에 매우 실망했고,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며 바로 항의 메일을 보냈다. (이후 사무실에 전화도 몇 번 시도했는데, 이번 사태가 불러운 매서운 항의가 무서워서 아예 전화선을 끊어버린 모양인지 전화가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사건 경위를 알고 보니 대행사와 관광업 종사자들이 돈을 벌고 싶은 욕심에 입석 티켓을 무리하게 팔아버렸고, 이 때문에 실제 들어갈 수 있는 입석의 정원보다 훨씬 더 많이 팔아버렸던 거다. (예를 들자면 버스 좌석이 실제로 45석 밖에 없는데 300석 이상을 판 셈이다.) 여기에 누군가 슬그머니 돈을 벌 욕심에 가짜표도 만들어 팔아버려서, 이 모두를 제대로 분간을 할 수 없었던 시큐리티들이 - 며칠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인근 마을 사람들부터 다 들여보내줘버린 일도 한몫했다.
인티 라이미는 이곳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식이기 때문에 삭사이와만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지만 관리 인원은 태부족했기에, 그 사람들이 새치기를 해서 넘어오는 걸 제대로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정작 표를 산 외국인들은 아무도 못 들어가고, 표값을 내지 않은 페루 사람들만 다 들어가있었던 것이다.
VIP 표 같은 경우에는 보통 고객 이름까지 같이 확인해야하니 문제가 없었겠지만, 입석의 경우는 정말 표를 산 모든 이가 쌍욕을 할 정도로 아수라장으로 관리를 해버렸기에 주최 측과 주정부 측에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화선을 끊어버렸나? 흐음...!
여튼 그날의 나는, 인티 라이미 의식 속에서 역사 속 잉카 제국이 다시금 부활하는 그 순간을 못보고, 페루라는 나라의 씁쓸한 단면만을 다시 마주하며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그렇게 쿠스코는 나에게, 신화와 유적, 축제와 사람들, 그리고 한 번쯤은 당해볼 만한 관광 사기까지(실제로 쿠스코에서 관광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은 매우 흔하다) - 모든 것이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하는 ‘태양의 도시’로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