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개발 교육석사 유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택하고, 페루 모케구아를 떠나며
일상 속에서 마치 철학자가 된 듯한 느낌으로 수많은 고민을 품고 살아가던 페루 모케구아에서의 삶.
해외살이와 문화 적응의 1년을 지나고, 순조롭게 1년 더 연장 근무를 하게 되면서 -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바뀌었다.
국가 시스템의 미비함, 정부 부처가 초대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비자 규정이 없어 불안정한 체류를 경험했던 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열악한 상황과 현실 등 - 어쩌면 개발도상국이기에 겪었던 일들이겠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마주한 경험을 종합적으로 녹여 좀더 학술적인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토대로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만 간직했지만, 어떻게 실행해야할 지 몰라 꿈으로만 남겨두었던 석사 유학 도전이 현실적인 목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7년 8월, 근무 연장 계약과 건강검진을 위해 한국에 돌아갔을 때 바쁜 시간을 쪼개어 영국 전문 유학원을 찾아갔다. 이후 페루로 복귀하여 아이엘츠 성적 준비와 SOP, 추천서 등을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던 중 - 그해 12월, 내 결심을 확고하게 굳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극도로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벗어나서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돋보였던 영재고등학교 코아르 모케구아 아이들.
5학년(우리나라로 치면 고3) 학생들은 11월 말까지 모든 IB 과정의 최종 시험을 치르고 에세이를 제출하였으며, 이후 대학교에 하나씩 원서를 넣는 등 한창 입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 코아르에 오기 전까지 대학 진학뿐만 아니라, 장래희망을 가지는 것 또한 일종의 사치였던 아이들. 그러나 학교와 배움이라는 기회를 통해 맑고 똑똑하게 성장한 아이들이 코아르 3년 동안, 바라던 대로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전공을 택해 미래에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페루는 사회·경제적 이유로 학업 중단 비율이 높고, 자연스럽게 대학 졸업자의 비중도 낮은 나라 중 하나다.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는 우리나라에서야 학사 학위 정도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는 자신의 명함이나 소개글에 학사 학위를 병기할 정도로 의미있는 직함이었다(특히 지방에서는 더욱 그렇다). 선생님들조차 대학을 가지 못해 - 그 대안으로 직업 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꾸준한 연수를 통해 교사일을 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현실 속에서, 학교가 아니었다면 컴퓨터조차 한번 못 만져봤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코아르 아이들은 과연 대학이라는 또 다른 꿈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현실의 벽은 거대한 빙산만큼이나 높고 차가우며 견고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모 처의 대학에서는 내 제자 P에게 편도 비행기 티켓값만 내면 시험을 치르게 한 뒤 4년 등록금과 일부 생활비를 주겠다고 약속하였지만, P의 가정에서는 입에 겨우 풀칠하는 형편에 1000달러나 하는 거액의 돈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유학의 꿈은 포기하였으며, 대안으로 수도 리마에 있는 대학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다른 제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버스로는 왕복 40시간이 넘는 리마. 아주 저렴한 교통비조차 부담이 되어(당시 기준으로 대략 5만원에서 10만원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시험을 주저하게 만드는 집안 형편에 발목이 잡힌 코아르 친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과 장학금, 그리고 생활비 일부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열정으로 단단한 빙벽을 녹이려고 했다.
장학금 지급을 약속한 타 지역 대학으로 입시 시험을 치러 가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나 선생님에게 소일거리를 부탁해서 알바를 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코아르 친구들의 모습이 기특해서 개인적으로 소액의 돈을 아무 조건없이 주려고 했지만, "자신의 문제는 최대한 자신들이 해결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아이들이 먼저 내 제안을 거절했다.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아이들. 속 깊은 그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마찬가지로 공과대학이나 광물학 등이나 몇몇 전공에 한해 '전액 학비 및 생활비 지원'이라는 근사한 조건을 내건 모케구아 및 자신의 고향 지역 대학 진학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페루 내 최고 대학에 입학한 친구도 꽤 있었고, 대다수의 아이들이 전국 각지의 대학에 진학하고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나와 함께 울고 웃던 코아르 친구들이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학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니, 이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다칠까봐 염려하며 잔뜩 구겨진 내 마음도 조금씩 펴지는 듯했다.
비록 모두가 자신의 능력만큼 힘차게 날개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날개가 조금 접혔다고 해서 아예 날 수 없게 된 건 아니었다. 각자가 처한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의 찬란한 꽃을 피워내고자 정성을 들이는 코아르 학생들의 의연한 태도를 통해 - 나는 삶의 강인함과 희망의 본질을 배웠다.
그중 나를 포함한 코아르 모케구아 교직원 모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던 큰 사건이 터졌다.
항상 발랄한 모습과 웃는 모습이 예뻤던, 똑똑하며 수업 중 날카로운 질문도 곧잘하던 여학생 F.
성적도 골고루 우수해서 모든 선생님들이 좋은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별 무리없이 진학할 거라 굳게 믿었던 그 F 학생의 부모가 졸업 전에 딸의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F의 고향은 아레키파 주 산골짜기에 있는, 하루에 버스가 한 두대 지나갈까 말까한 시골 마을이었다.
나라의 공식 언어인 스페인어도 잘 구사하지 못하고 (페루는 케추아어나 아이마라어를 주로 쓰는 원주민계 주민의 비중이 높은 나라다)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가난한 원주민계 가정에서 태어난 F는 옆 동네 중학교를 다니다가, F를 눈 여겨 본 선생님의 추천으로 코아르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F의 빛나는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들은 돌아가면서 부모를 설득했고, 담임 선생님과 교장, 교감 선생님 등은 몇 시간 운전을 해서 다함께 고향 마을에 찾아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혹시나 가정 형편이 걸림돌이라면,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까지 되는 모케구아 지역 내 대학이라도 진학을 권했으나, 부모의 태도는 완강했다.
F의 부모는 찾아간 모든 교원들에게 더듬거리는 스페인어로 대략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자는 배워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하지만 중학교 선생님에게 속아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시켰다.
이젠 이만큼이나 배웠으면 됐다. 집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동네에서 대충 결혼시켜 애나 낳으면 된다."
남존여비 사상이 아직도 강한 페루 시골의 인습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
마치 옛날 옛적 잉카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남루한 옷차림의 학부모들.
그리고 그 한심한 부모 아래에서 스스로 자라날 기회를 무참히 짓밟히게 된 불쌍한 F.
F는 이 모든 사실을 예감한 듯, 그 자리에서 담담히 눈물만 흘렸다고 전해들었다.
교장과 교감 선생님은 할 말을 잃었고, F의 담임이었던 A 선생님은 "도대체 저 인간들은 언제적 시대에 살고 있냐!"며 분개했지만, 법률상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대학 진학 서류를 제출할 수 없기에 학교로서는 더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교직원들의 속을 끓이던 나날이 지나고 어느덧 졸업식 전날.
F의 아버지가 나타나 애를 데리고 홀연히 사라졌고, 그날 이후로 우리 모두는 다시는 F를 보지 못했다.
F가 사라진 뒤로, 우리는 그녀가 언젠가는 부모의 그늘에서 운좋게 탈출하여 자유롭게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F는 - 인터넷은 커녕 전기도 없는 아레키파 산골짜기 마을로 다시 돌아가 - 자신이 지닌 번뜩이는 재능을 계곡 속에 묻어버린 채 인습에 젖은 시골 마을의 촌부로서 살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어언 8년 가까이 지나버린 지금, 그녀의 소식을 알 길은 전혀 없다.
그 당시 우리 코아르 교직원 모두가 느꼈던 비참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금도 F의 체념 섞인 담담한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유리 조각으로 찔리는 기분이 든다.
그날 이후로 나는 국제개발 전공 유학을 굳게 결심했다.
세상 어딘가의 또 다른 F를 위해 - 다시는 같은 일이 내 눈 앞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겠다고.
허망했던 F의 일을 기억하는 나는 근무와 개인 공부를 병행하며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시작했고, 그 노력이 닿았는지 런던 소재의 교육대학원에 합격하여 그 해 9월부터 새학기 석사 유학생으로서의 허락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페루에서의 정해진 2년을 모두 마무리하고 떠나기 직전, 내 마음을 단단히 다잡게 한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외국인 선생님인 나와의 수업에 적응을 마치자, 아이들은 점점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줄곧 떠들며 딴청을 피워댔다. 그렇게 각 반마다 말썽꾸러기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부터 정을 붙이기도 쉽지 않던 벨라운데 테리 학교 아이들과의 작별 시간도 다가왔다.
벨라운데 테리에서는 세군도 Segundo,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을 가르쳤지만 이 녀석들의 나이는 제각각이었다. 제 나이에 알맞은 학생은 절반도 되지 않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는 예닐곱살 정도 많았으니 대학교 3학년쯤 되는 아이가 중학교 수업을 듣고 있는 셈이었다.
이는 당시 페루의 학교에서는 단순히 전년도 학교 출석 일수가 모자라서 유급을 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과목별 시험을 합격하지 못해도 유급을 당해서 그 과정을 다시 1년 동안 반복해야 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석이 모자란 이유는 대부분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원래 나이보다 적어도 2년 이상 더 꿇었던 고학생들의 사정은 이러했다.
우선 학년이 올라갈 수록 학비나 교재비, 기타 잡비 등의 교육 비용이 점점 늘어난다. 페루의 경우 학교에서 프린터물을 내어주면 학생이 그 종이와 복사값을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내가 프린터해 온 과학 학습지를 학생들에게 나눠 주니 모두들 자연스럽게 동전을 꺼냈다. 그제서야 페루 학교의 문화를 알게 된 나는 "돈은 일절 받지 않을테니 그저 열심히 공부해 달라"고 말했다.
이렇게 유급과 중단을 반복하며, 아이들은 일하고 돈을 모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집안의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그 해에는 부모님의 일을 돕거나 콤비(낡은 봉고를 개조한 동네 버스) 안내양 등 어린 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좀좀따리 학교 다닐 돈을 모아 다시 이듬해부터 학교를 다니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업 성취도는 낮아질 수 밖에 없는데, 생각해보면 배워야 할 진도나 내용을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이는 당연하다. 그리고 교과서는 너무도 비싸기 때문에 학교에 놔두고 이를 몇년 동안 물려받아 쓰기에 학교 밖에서 예습이나 복습도 어렵다. 그렇게 공부에 흥미를 못 느껴 유급을 반복적으로 당해 영영 자퇴하거나, 일을 돕느라 출석일수를 채우지 못해 결국 제적당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시골 지역의 공립학교다보니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경우가 훨씬 많았고, 점심을 먹을 돈이 없어 굶거나, 그래도 배가 고프면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도 흔했다. 페루는 수돗물에 석회 성분이 많아 이를 오래 마시면 몸에 각종 결석이 생길 정도로 위험성이 높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크니 감수하고 마시는 것이다.
마치 애니메이션 <검정 고무신> 속 에피소드처럼, 나는 모케구아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우리나라 부모님 세대 이상이 겪었던 각종 삶의 애환을 내 눈앞에서 보았다.
제대로 된 기반 시설이 없어 물도 전기도 없는 집들이 모여있는 빈민촌에서 사는 아이들.
배움의 기본인 출석부터 제대로 되지 않아 부진이 누적되어 유급에 유급을 거듭하는 아이들.
고작 만 원 남짓이면 충분히 오갈 수 있는 이웃 국경 도시 타크나 Tacna 조차도 평생 가보지 못한 아이들.
자신이 태어난 모케구아에서의 삶을 쳇바퀴처럼 돌아가야 하는 벨라운데 테리 아이들을 보며 - 비록 수업 시간에 교사들마다 뒷목을 잡을 정도로 징그럽게 말을 안 듣기는 했지만 -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근무날이 다가왔고, 나는 담담히 그날의 수업을 마친 뒤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수업이 마지막이에요. 여러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는 눈치였지만, 금새 담담해졌다. 이들에게는 교사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워낙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열악한 공립학교의 특성상 교사가 그만두고 다른 사람이 와서 채우는 일이 워낙 잦다보니 학생들에게는 교사 하나가 달라지는 건 별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국의 유명 관광지인 쿠스코는커녕, 이웃 도시조차 가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나의 말은 그저 꿈결처럼 들렸을 것이다.
모든 수업을 마친 뒤 교재와 프린터물, 개인 물건을 모두 정리하는 도중, 가장 똑똑하고 성실한 여학생 M이 쭈뼛쭈뼛 내게 다가왔다. M은 이내 내게 말했다.
"저를 입양해주세요. 선생님."
M의 아빠는 자꾸만 '배워봐야 별 소용이 없다'고 야단치지만, 그래도 M은 계속 공부해서 대학에도 가고 싶다고 했다.
"혹시 저를 입양해 주실 수 있나요? 저도 선생님처럼 좋은 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요."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자신이 가진 최대치의 용기를 냈을 M의 말에 나는 느닷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 순간 빛나는 재능을 안타깝게 죽여버린 F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M이 절대 그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언을 해 주었다.
"올해 말까지 내신 시험을 잘 치르고, 코아르 편입 시험을 준비해 보렴. 거긴 돈이 들지 않고 3년 동안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어. 그리고 코아르 출신이 되면 대학 진학과 장학금에서도 유리하단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반드시 대학까지 가야 해.”
내 말을 다 알아들은 똑똑한 M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꼭 코아르에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국까지 조심히 돌아가세요, 선생님.”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났고, 나의 파견 교사로서의 근무와 페루 모케구아의 삶도 함께 막을 내렸다.
나는 이렇게 페루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
내가 두고온 것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내가 떠나온 곳에는,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낸 너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마 다시 내가 이곳에 올 일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너희를 응원하는 삶을 살 것이다.
지구 반대편 대륙에 위치한, 태양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나라 페루에서의 2년.
나는 그곳에 남겨둔 삶의 조각들을 기억하며, 너희들에게 빚진 마음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너희의 삶이 아무리 지난하고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지구별 어딘가에서 끝까지 너희들을 응원하는 이가 있음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란다.
부디 너희들의 삶이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길,
삶이 주는 시련과 빈틈을 힘든 한숨 대신, 건강한 웃음으로 채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제서야 -
너희와 있었던 자세한 이야기를 키보드로 두들기고 글로 정리하여 세상에 풀어놓는 나를 용서해 다오.
* 페루 편의 일부 내용은 한국교직원공제회 The-K 매거진 2018년 3월호「먼 나라 교육 편지」코너에 '안데스의 희망을 만나다 - 페루 모케구아'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다음 편은 칠레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