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페루와 칠레의 경계, 아리카

쉽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칠레 최북단 국경 도시와 주변 알티플라노

by Angela B


아리카 Arica 는 칠레 최북단 아리카 이 파리나코타 Arica y Parinacota 주에 있는 인구 22만의 중소도시이자, 페루 최남부 타크나 Tacna 와 국경을 맞닿은 항구 도시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약 4시간을 달리면 또다른 이웃 나라인 볼리비아 국경에 닿을 수 있어, 시내에 볼리비아 영사관이 있는 등 국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에서 여행 오는 사람은 페루 리마에 도착 후 쿠스코를 거쳐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 볼리비아 쪽으로 이어지는 소위 '국민 루트'를 따르거나, 아니면 바로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넘어가기에 한국 여행자들에게 아리카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페루에서 육로를 이용해 칠레로 넘어갈 경우에는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 도시이기도 하다.


아리카를 가려면 페루 타크나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거나, 인원이 모이면 출발하는 5인승 택시를 타는게 일반적이며, 이 두 도시를 오가는 짧은 기차 노선도 있어 여러 방법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사항은 칠레는 농산물 수출국으로서 검역이 매우 까다로운 나라이므로, 육로로 이동할 경우에 음식이나 과일 등을 소지하고 있다면 모두 얄짤없이 세관에 압수된다.


이곳에서는 칠레의 대표 여행지인 아타카마 사막의 마을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San Pedro de Atacama 로 가는 장거리 버스가 매일 저녁 출발하고(경유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약 12시간 이상 소요), 또한 아타카마에서 소금 사막 투어로 유명한 우유니 Uyuni 로 향하는 다양한 루트도 이어진다.


(참고로 남미는 땅덩이가 큰 만큼 버스 노선망이 잘 발달되어 있고 버스 이동이 어렵지 않기에, 장거리 이동조차 하나의 훌륭한 여행이 된다.)



IMG_9812.jpg 아리카의 상징인 아리카 언덕 Morro de Arica
IMG_9806.jpg 에펠탑으로 유명한 그 구스타프 에펠이, 칠레에서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산 마르코스 대성당 Catedral de San Marcos
IMG_9803.jpg 철덕후 구스타프 에펠답게, 성당 내부 구조물이 철로 되어 있었다.
IMG_9782.jpg 바다 위에 줄지어 있는 대형 선박들. 이곳이 사막 지형을 낀 항구 도시임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IMG_4568.JPG
IMG_4567.JPG
IMG_4569.JPG
아리카에서 칼라마(Calama, 구리 광산으로 유명한 도시)를 거쳐 아르헨티나 북부나 볼리비아로 갈 수 있다. 당시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많아 버스 터미널이 북새통이었던 기억이다.



정부 부처 간 MOU를 통해 페루로 파견을 가게 되었건만, 막상 도착해보니 당국의 미비한 규정 때문에 체류 비자를 제때 받지 못해 어이없게도 관광비자로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2-3개월마다 다른 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방법으로 비자 연장을 해야했는데, 모케구아에서 4시간도 안 되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외국 도시인 칠레의 국경 도시 아리카에 여러 번 방문하게 된 것이다.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는 육로로 다른 나라 국경을 넘는다는 건 늘 신기한 경험이었다.




IMG_1466.JPG
IMG_1468.JPG
매일 국경 택시와 개인 차량, 버스로 북적이는 페루-칠레간 국경. 짧은 기차로도 육로를 넘을 수 있다(기차를 타본 적 있지만 경비가 삼엄해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주변 풍경이 페루 코스타 지방과 비슷한, 사막빛의 작은 국경도시 아리카는 원래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페루 영토였다. 그러나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이어진 남미 세 나라 - 칠레와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 연합군 간 태평양 전쟁 Guerra del Pacífico 결과, 국경선이 크게 바뀌며 이 도시는 칠레 땅이 되었다.


원래 페루와 볼리비아의 영토는 지금보다 훨씬 컸고, 반대로 칠레의 영토는 훨씬 작고 좁았다. 하지만 볼리비아 리토랄 주의 아타카마 사막 지역에 있던 질산칼륨(초석, 당시 비료와 화약의 핵심 연료)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칠레가 압승하면서 볼리비아는 태평양을 면한 리토랄 주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으며(현재 칠레 안토파가스타 주), 페루는 아리카와 타크나 지역을 빼앗겼다.


이후 1883년, 영토 조정을 위해 체결된 앙콘 조약 Tratado de Ancón 에 따라 페루는 타크나와 아리카를 10년간 칠레에 임시 양도하기로 했다. 조약에는 10년 뒤 주민 투표로 귀속을 결정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나, 투표는 수십년간 미루어졌고 1929년이 되어서야 리마 조약 Tratado de Lima 으로 최종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타크나는 페루로, 아리카는 칠레에 영구 귀속되었으며, 현재의 국경선은 그때 확정되었다.


원래는 페루 땅이다가 칠레로 편입이 된 도시여서 그럴까? 처음에 아리카에 도착했을 때는 페루 문화와 칠레 문화가 묘하게 뒤섞여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둘러보니, 비슷한 크기의 페루 도시들보다도 훨씬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와 북적이는 분위기에서 - 현재 남미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국가 중 하나인 - 칠레의 색이 분명히 느껴졌다.




아리카 시내에는 앞서 서술한 이유로 인해 볼리비아 영사관이 있었다. 나는 이곳을 몇 차례 방문한 끝에 볼리비아 관광 비자를 받았다. 한국 여권 소지자는 볼리비아 입국 전 반드시 30일짜리 단기 관광 비자를 받아야 방문이 가능하기에, 한국에서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여행 루트상 페루 리마나 쿠스코에 있는 볼리비아 대사관·영사관에서 비자를 받는다. 하지만 그곳들은 워낙 여행자가 많아 비자 처리 지연으로 악명이 높았고, 접수부터 며칠씩 기다리는 일이 흔하다. 시간이 금인 여행자들에게 마냥 기다리기는 어려운 일인데, 다행히도 칠레 아리카에서는 볼리비아 비자를 비교적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이곳을 방문했던 당시에는 영사관 분위기가 기묘하다고 느꼈다. 영사 한 명만 축지법을 쓰듯 뛰어다니며 분주했고, 나머지 직원들은 있는 듯 마는 듯 후줄근하게 앉아있었다. 게다가 느리게 작동하면서 오류까지 잦은 컴퓨터와 이에 보조를 맞추는 듯한 느긋한 일처리로 인해 내 복장을 터지게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세 번을 찾아가서야 영사관에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사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또 다른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이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따로 풀어보려고 한다.)





IMG_9810.jpg
IMG_9817.jpg
몇몇 곳을 제외하고 깡시골에 가까운 모케구아에 있다온 터라, 이 작은 아리카 시내도 나름 도시 냄새가 난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IMG_9808.jpg
IMG_9791.jpg
건조한 사막 기후에 사느라 피부가 많이 상했었기에, 쇼핑몰에 들러 모케구아에서 팔지 않거나 비싸서 못 사는 화장품들을 칠레에서 사 오기도 했다.
IMG_9780.jpg
IMG_9781.jpg
시내 외곽의 벽화들. 각각 "생각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이니까 네가 선택해" 라는 문구다.





아리카에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여행으로는, 동쪽으로 이어지는 볼리비아 접경지대의 광활한 고원인 알티플라노 Altiplano 투어가 있다.

알티플라노는 남아메리카 중서부 안데스 산맥 사이에 자리한 거대한 고원으로, 대부분 볼리비아와 페루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나 남쪽으로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일부까지 뻗어있다. 해발 4000미터를 훌쩍 넘나드는 이 고원은, 마치 천국에 한 발 더 가까워진 듯한 풍경으로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숙소를 통해 예약이 가능했던 여행 상품은 알티플라노 푸트레 Putre 마을과 라우카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Lauca 을 함께 둘러보는 당일 투어였다. 하루에 4500미터 이상을 오르내리는 빡센 일정이라 쉽지 않고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될까 염려했지만, 그보다 알티플라노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훨씬 컸다. 결국 나는 고산병과 거칠어질 호흡을 각오하고 새벽 투어 버스에 몸을 실었다.




IMG_2660.JPG 칠레의 알티플라노 지역 여행은 보통 아리카에서 출발한다. 나처럼 투어를 이용할 수도 있고, 일행이 많다면 곳곳을 다니기가 쉽도록 자동차를 렌트해서 다닐 수도 있다.



투어 초반은 아레키파나 푸노, 쿠스코 등 페루 고산지대를 오가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운전자의 거친 운전과 함께 - 심한 멀미와 괴로운 고산병으로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했던 페루의 꼬불꼬불한 산길에 비해, 칠레 아리카 이 파리나코타 지방의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그런지 의외로 쾌적했다.


라우카 국립공원과 춘가라 호수 Lago Chungará 로 향하는 길은 잘 닦이고 길게 뻗은 직선도로가 대부분이라 멀미가 일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 길을 잘 아는 볼리비아 알티플라노 출신 운전기사는 투어 손님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급발진이나 거칠게 운전하는 일 없이 신사적으로 차를 몰았다. 그 덕분에 나는 고산지대 도로에서 처음으로 헛구역질을 하지 않고, 두통도 없이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눈으로 담을 수 있었다. (같은 고산지대라도, 도로 상태와 운전자의 습관에 따라, 몸의 반응과 고산병 증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IMG_2668.JPG 이날 알티플라노 투어 중 들리는 중간지대 마을. 그래도 해발 3000m 가까이 된다.



나를 제외한 투어 손님들은 이런 고도가 익숙지 않아 "토하고 싶다", "어지럽다"를 연신 외치는 분이 속출했지만, 그때마다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차를 잠시 멈춰 세우고 모두에게 천천히 걸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라고 말했다. '우리들이야 이런 고도에 워낙 익숙하지만, 손님들에겐 어려울 거'라며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손님들의 컨디션에 따라 투어 일정을 유연하게 조정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놓치지 않는 여유와 배려가 고마웠다. 정말이지 '고산지대 여행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천국 같은 풍경과 함께, 여행사 사람들의 진심 어린 자세와 배려에도 깊이 감동한 날이었다.



IMG_2675.JPG 해발 고도가 4000m를 넘어가면 설산의 풍경이 나온다. 당시 남미에 온 이후 처음으로 본 설산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IMG_2702.JPG 숨 쉬기에 턱없이 모자란 산소 때문이었는지(...) 넋을 잃고 바라본 아름다운 춘가라 호수 Lago Chungará
IMG_2717.JPG 너무나 아름다운 산책로였지만 이때는 죽을 만큼 머리가 아파와서 얼마 걷지 못했다. 당연하다.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고도는 5000미터에 달한다.
IMG_4604.JPG 정말이지 길다란 나라 칠레. 그러다보니 자연 식생이나 기후가 지역별로 워낙 다양해서 볼거리도 즐길 거리도 많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내리쬐는 모케구아의 삶에 질식 당하는 기분이 들 때마다 -

내게 한 번씩 숨을 트이게 해준 작은 도시 아리카.

칠레로 향하는 첫걸음의 도시이자, 알티플라노의 찬란한 풍경이 인상깊은 곳.

그곳에서 때때로 누렸던 평온과 행복을, 나는 여전히 고맙게 기억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