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거대한 거울, 우기의 우유니 소금 사막

황홀한 풍경을 오가는 길 끝에서 마주한, 볼리비아 여행의 어두운 뒷면까지

by Angela B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17년 초 첫 번째 아타카마 여행의 끝자락.

매일 밤마다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내리치는 기상 이변으로 인해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바람에, 물가도 비싼 아타카마 사막 한가운데서 일주일 넘게 여행 일정이 지체된 상태였다.

함께 여행하던 동기 언니와 나는, "우리 이러다가 아타카마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주변 사막 풍경만 보다가 집에 돌아가는 거 아니냐" 며 허탈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폭우와 번개가 점차 잦아들던 어느 날, 호스텔 주인이 "드디어 모레 새벽 아침쯤에 볼리비아 국경 쪽 도로가 열릴 것 같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우리의 다음 목적은 우유니 사막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마자 발품을 팔아 볼리비아로 가는 루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우유니로 가는 경로는 여러 가지다. 버스, 개인 차량 등의 옵션이 있지만 보통은 볼리비아 국립공원과 우유니를 두루 포함한 2박 3일 투어를 통해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반대로 볼리비아 쪽에서 칠레로 넘어오는 투어도 구성은 똑같다.)


하지만 같은 투어로 볼리비아에서 넘어온 호스텔 투숙객이 말하길, 칠레 쪽과는 달리 볼리비아 쪽 국도는 오프로드 비탈길이며 - 투어 숙소가 밤에 너무 추웠는데(우유니도 해발 3,600미터를 훌쩍 넘는 고산지대다) 담요도 난방시설도 부족해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는 후기를 들려주었다. 어쩌면 이 투숙객이 너무 싼 투어를 가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보았지만, 이 사람을 제외하고도 비슷한 소감을 들려주는 사람을 여럿 만나니 우리 일행은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결정적으로, 우리에게는 사막 속 폭우라는 말도 안되는 기상이변을 만나 아타카마에서 시간을 낭비한 탓에, 3일이 꼬박 소비되는 투어를 하며 넘어갈 시간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투어도 하고, 고산 지대에서 몸을 많이 상하지 않도록 하루씩 휴식일도 넣는 등 느긋하게 일정을 짰으면 좋았겠지만 - 이미 이놈의 사막에서 금같은 시간을 많이 뺏긴 덕에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제일 빠르다는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이것도 그동안 국경 재개방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잽싸게 움직였는지 이미 3일치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된 상황이었다. 방법을 전전긍긍하다가 우연히 "아타카마에서 우유니로 사륜구동차를 타고 하루 반나절이 걸려 넘어가는 트란스포르테 Transporte, 즉 교통편 종일 투어를 운영하는 여행사가 있다"고 해서 바로 그 여행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 앞에서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외국인 여행객들을 만나 바로 그룹을 만들었고, 여행사 직원과 함께 협상했다. 다음날 아침에 바로 데리러 온다고 하여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 지겨운 사막을 떠나는구나! 그리고 며칠 만에 밤이 되어도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던 날, 우리 일행은 별을 보면서 조촐한 작별 파티를 하고 사막과 이별할 준비를 했다.




약속한 대로 사륜구동이 왔고, 이날 하루를 책임질 볼리비아 출신 기사와 가이드가 "우리는 먼저 칠레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그곳과 가까운 국립공원을 지나간다"며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전날 와인 숙취 탓인지 어디 포인트를 지나가는지는 상세히 듣지는 못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점점 지겨워지는 이 아타카마 사막을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했기에 설명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국립공원을 벗어난 이후에는 밴으로 갈아타고 도로를 달려 오후에 우유니에 도착한다고 했다.

여행객들의 갖가지 짐을 위에 매달고 달리는 사륜구동차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성인 여섯명이 낑겨 타야했다. 모두들 이 상황에 대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살벌한 표정으로 기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달리고 나자, 황량하고 눈 덮인 고산 아래 충격적인 외관의 건물들이 몇 채 있었는데 , - 만약 “MIGRACIÓN BOLIVIA” 표시라도 없었다면 - 이곳이 국경 사무소인지, 버려진 창고인지, 혹은 공중 화장실인지 구분조차 어려울 만큼 낡고 초라했고, 그 모습을 본 우리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 당시에는 거대한 고산을 앞에 두고 이렇게 얼기설기 서 있는 건물들이 바로 볼리비아 이민국이었다. 표시와 국기가 없었다면 정말 못 알아봤을 것이다.


나름 국경이라고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였지만, 실제로는 사무용품 몇 개와 스탬프가 놓인 책상, 그리고 직원 두어명이 앉아 있는 의자가 전부인 썰렁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여튼 가이드는 우리를 긴 줄에 세웠고, 간만에 열린 국경으로 인해 좁은 건물 앞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심드렁하게 각종 여권을 점검하던 직원 한 명이 내 여권을 보고 갑자기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볼리비아 비자에 문제가 있다며, 나에게 입국세 명목으로 100달러의 돈을 현금으로 내라고 했다. 마치 뇌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듯한, 갑작스럽게 들은 직원의 폭탄 발언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사실 내 비자에 진짜로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칠레 아리카 시내의 볼리비아 영사관에서 필요한 모든 절차를 정식으로 밟아 비자를 발급받았다. 그때 내 증명사진도, 필요한 개인 정보도 다 정리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서류로 제출했다. 다만 담당 영사가 너무나 남미스러운 실수로(?) 비자에 내 사진을 넣는 걸 까먹고 인쇄해버렸고, 본래라면 사진이 들어가야 할 네모칸이 비어있었던 것 뿐이었다. 내가 이에 대해 영사에게 지적하자, 영사는 마치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는 듯한 태도로 출입국에 별 문제 없을 거라며 멋쩍게 웃는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받은 볼리비아 비자에는 실수한 장본인인(...) 담당 영사의 이름과 서명이 적혀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책임을 그에게 묻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리카 영사관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히고, 내게 돈을 요구하는 직원에게 부당한 처사라고 항의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는 상황을 보다못한 우리 가이드가 나서서 "언제까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작정이냐"며 (이미 몇십명이 건물 밖에 서 있었고, 뒤이어 투어 차량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비자가 있는 게 중요하지, 사진이 뭐가 중요하냐"며 직원을 달랬고, 가까스로 입국 도장을 받아 볼리비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게 굴러갈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별일 없이 넘어간 걸 보면, 아무래도 가이드와 직원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듯 싶었다. 여튼, 이렇게 또 한 번 위기를 겨우 벗어나며 볼리비아에 입국을 완료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우리는 알티플라노 지역의 특징을 두루 갖춘 에두아르도 아바로아 안데스 자연 국립공원 Reserva Nacional de Fauna Andina Eduardo Avaroa 방향으로 지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실 그 당시에 상황에 대해 크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작은 사륜구동차에 불편하게 몸을 구겨 타면서 오프로드를 몇 시간 달린 탓인지 - 칠레에서는 딱히 없었던 고산병이 갑자기 심하게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맨 앞으로 자리를 옮겨서 약을 먹고, 옥죄어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쉬어야 했다. 다행히 자리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에는 조금은 편하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곳에서 잠시 휴식하며 즐긴 풍경



차에는 에어컨 기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열고 칼바람을 맞으며 가는 수 밖에 없었다. 탁 트인 오프로드 풍경길은 예뻤지만 그도 잠시 뿐, 그동안 사막에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발현되는 건지 정신이 아득해지며 병든 닭처럼 졸기 바빴다. (지난 편에 썼듯이, 자꾸 졸음이 오는 것도 고산에 적응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기를 몇 시간, 이후 다른 투어와 합류해 드디어 밴으로 바꿔탔다. 이후에는 제대로 된 국도를 이용해 우유니로 향할 수 있었다.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 Salar de Uyuni 는 가장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으로, 이곳을 찍은 사진을 우연히 보고 반해 남미 여행을 버킷리스트에 넣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과거에 바다였던 지역이 지각 변동으로 융기하고, 거대한 호수가 오랜 세월이 지나 말라붙어 생긴 이 소금 사막은 해발 3,600m~3,700m 사이의 고산 지대에 자리한다.


우기(12월~3월)가 되면 사막은 하늘을 통째로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로 변하고, 건기(4월~10월)에는 끝없이 이어진 소금 결정들이 사막을 육각형 패턴으로 채우며 기하학적 문양을 만든다. 이렇게 우유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풍경도 완전히 달라져, 같은 장소를 보고도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특히 우기의 우유니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는 별칭 그대로, 하늘과 땅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두 사이 경계가 사라지는 광경을 선사한다.



우유니에 오자마자 우리는 어제 급하게 예약한 숙소를 찾아 빠르게 짐을 놓고, 여행자 거리 쪽으로 나갔다. 한국인 여행자들로 붐비는 여행사들을 찾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새벽 2시에 출발하는 스타라이징 투어, 늦은 낮에 시작해 일몰까지 보는 투어 등을 발빠르게 예약하고 허겁지겁 돌아와 쪽잠을 잤다. 도합 2주 넘게 사막에서 허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 동행 언니와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이날을 포함해 겨우 3일 남짓밖에 없었다. 그래서 몸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온 목적인 우유니 사막 새벽 스타라이징 투어만큼은 꼭 하고 싶었기에 욕심을 냈다. 그리고 이곳의 다양한 투어사 중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은 곳을 우선적으로 고른 까닭은, 우유니의 특징을 활용해 대형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재미있는 사진들을 찍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물론 실제로 그러했고, 이 선택은 베스트였다.).




지나가다가 들린 기념품 가게. 소금으로 만든 조각들이 인상적이었다.



우유니 역시 해발 3,600m 이상의 높은 고산 지대인지라, 우리 일행은 고산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칠레에서 볼리비아 우유니로 달려와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다시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니. 동기 언니는 두통을 호소했고 나는 근육통으로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투어를 무를 수는 없었다. 피로한 몸을 일으켜, 소금 사막 위에 비치는 은하수 풍경을 보기 위해 굳건한 의지로 뭉친 한국인 투어팀이 기다리는 투어 차량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덕에 우기를 맞아 전체가 거대한 거울로 변한 우유니 사막에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밤 중 하나를 보냈다.

고산 지대의 밤추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혹독했고, 너무 추운 나머지 이를 딱딱 부딪히며 그 추위를 견뎠지만 - 은하수는 그 어떤 풍경보다 경이로웠다. 마침 그 때가 그믐이었기에, 운 좋게도 머리 위와 발 아래 무수한 별들이 떠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강추위에 얼어서 냉동육이 되어가는 내 손을 퍽퍽 때려가며도, 환상적인 우유니의 사진을 찍는 걸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담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어붙은 손을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했다.




추워서 덜덜 떨며 폰카로 겨우 찍었던 사진. 당시의 사진 품질이나 해상도가 너무 아쉽다.
별빛이 자동차 헤드라이터보다 훨씬 밝았던 밤. 이 은하수가 내 발밑에도 그대로 떠 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별들이 많았다.
해 뜰 무렵 실시한 한국인들의 행위예술
얼어가는 손을 불어가며 사진으로 남긴, 우유니 특유의 아름다운 여명
여명의 찰나에서 남긴 사진들
거울 효과를 이용해 만들어 본 글자 코리아 KOREA 와 우유니 UYUNI



흰 소금 사막 위에 얕게 떠 있는 물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걸 이용해 재빠르게 움직이며 다양한 사진을 찍고 나니, 피곤하긴 해도 무척 재미있었다. 이것도 운이 좋았던 게, 우리가 새벽 투어한 그날 이전에는 며칠 동안 밤마다 비가 와서 투어가 모조리 취소되었다고 한다. 아타카마에만 비가 내린 게 아니라, 그동안 우유니 역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역시 모든 인생사는 새옹지마다.


새벽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 일행은 기진맥진해서 뻗었고, 이후에는 좀 쉬다가 바로 낮부터 일몰까지 이어지는 오후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도 새벽 투어 팀과 같은 멤버들이 모여 다함께 우유니의 다른 얼굴을 보러 나섰다.





물에 젖지 않은 구역까지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기사님들은 이 광활한 소금 사막에서 어떻게 길을 찾는거지?
원근감이 없는 원리를 이용하여 찍어낸 사진



구름이 낮게 떠 있는 하늘빛 우유니는 내가 여행 잡지와 인터넷 사진 속에서 본 풍경 그대로였다.

폭우와 번개로 뒤덮였던,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아타카마를 간신히 탈출하고, 이동으로 오가는 시간을 모두 포함해 몸을 혹사하는 조건으로 - 우리 일행은 실제로 코피가 터졌다 - 겨우 3일을 쥐어짜서 온 우유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언니가 그토록 바라던 풍경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어서, 우리를 덮쳤던 불운이 잠시나마 얼굴을 바꾸어 환하게 웃어준 것 같아 감사했다.



또 한 번의 행위예술을 시전하였다 ㅋㅋㅋㅋ 한국인의 단합력
너무나 낭만적이던 우유니의 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밤, 언니는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수도 라파스로 향하는 밤버스를 타고, 나는 숙소에서 좀더 시간을 보낸 뒤 새벽에 우유니에서 칠레 칼라마로 돌아가는 국제 직행 버스를 탔다.


하루 이틀만 더 머물렀다면 기차 무덤이나 주변의 다른 명소들도 둘러볼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우유니 사막 한가운데 사방에서 쏟아지는 별빛으로 샤워한 밤의 추억이 남았다. 이 소중한 기억을 나눠가진 언니와 함께 뜨겁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다시 모케구아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녘 버스 정류장으로 저벅저벅 향했다. (당시에 우유니는 그렇게 위험한 도시가 아니여서 밤에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헐렁한(?) 비자 문제는 또다시 내 발목을 잡았다.

온몸으로 별빛을 맞았던 우유니의 감동이 채 식기도 전에, 볼리비아 입국 때와 마찬가지로 - 그놈의 비자는 볼리비아를 나갈 때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교통편 투어로 갔던 허접한(?) 국경 사무소와는 달랐던 칼라마 루트의 국경
모든 사람이 통과할 때까지 하릴없이 바라본 풍경. 이 틈을 타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한두명 다가올 정도로 출입국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새벽 세 시부터 달려 아침 무렵에 도착한 칠레 칼라마행 버스.

승객들은 모두 내려 출국 심사대를 통과한 뒤에 다시 버스에 타야했는데, 버스 기사는 - 아무래도 이 황량한 곳에 승객을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 - 국경 심사가 다 끝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국경 사무소 옆에는 이미 도착한 버스들이 몇 대나 줄지어 있어서, 모든 승객들이 통과하려면 아주 긴 줄을 서야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보통 출국이 입국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데, 이날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로 꽉찬 줄의 길이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나를 여기에 버려두고 가진 않겠지...' 라는 심정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약 40분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그런데 출국 심사관이 내 비자를 유심히 보더니, "내 비자에 사진이 없으니 가짜다"라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나는 억울하고 황당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그에게 맞서서 대답했다. (이럴 때는 내 막무가내 스페인어는 기적처럼 유창해진다.). 그와 나눈 스페인어 대화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비격식(2인칭 tú) 문장들이었기에 한국어로도 그대로 옮긴다.



"네 비자는 가짜야. 왜 여기 사진이 없는데?"

"아니, 진짜라고. 여기에 적혀 있는 이름 봐. 이 사람이 아리카 영사인데 나에게 이 비자를 발급한 사람이거든? 나한테 따지지 말고 이 사람한테 따져."

"너 이런 비자로 어떻게 볼리비아에 들어왔어?"

"여기 봐봐, 사진은 없어도 도장은 있잖아. 가짜였다면 애초에 입국을 못 했지."

"영사관에서 이런 비자를 발급해 줄 리가 없어."

"그런데 난 이렇게 받았잖아. 그게 내 실수야? 아리카 영사관에 물으라니까. 발급일도 여기 적혀있어. 틀림없이 영사관에 기록이 있을 거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며) 그럼 정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야?"

"(황당한 목소리로) 진짜 문제가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볼리비아까지 들어왔겠어? 거기다 난 지금 여길 출국하잖아!"


그는 예상보다 강경하게 나오는 내 태도, 그리고 동양인 여자가 스페인어로 따박따박 반박하는 모습에 꽤 당황했는지 잠시 주춤하다가, 결국 본심을 드러냈다.


"그래도 비자에 사진이 없는 건 네 잘못이니까, 벌금으로 150달러를 내."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리고 실제로 볼리비아 법규에 있는지조차 의문인 저 벌금 150달러는, 아마도 그에게 들어가는 뇌물일 텐데.

내 실수가 아닌 남의 실수로 인해 국경에서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으니, 나도 그만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난 절대 못 줘."

"네 비자니까 네 실수잖아. 돈 내!"


그의 말도 안되는 으름장과 계속된 억지에 화가 난 내가 결국 고함을 질렀다.



"이봐! 이건 내가 아니라 너네 나라 영사가 실수해서 일어난 일이야!

내가 왜 굳이 비자를 위조해서까지 볼리비아에 들어왔을거라 생각하지?

내가 왜 너네 실수를 뒤집어 써야해? 말했잖아. 발급한 아리카 영사에게 따지라고!

니가 말한 벌금, 나는 못 내!"



나의 매우 단호한 말에 하나도 반박할 거리가 없던 그는 똥씹은 표정을 지었고, 마지못해 내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 역시 분노로 씩씩거리면서 그 인간을 관찰해보니, 그는 줄에 서 있는 외국인마다 비자로 시비를 걸며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던 프랑스 여행객 커플은 스페인어가 서툴렀는지, 그만 그에게 돈을 건네주고 말았다. 그는 돈을 슬쩍 챙겨 넣은 뒤,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뒤로 갔다. 결국 나에게 한 짓도, 그 커플에게 한 짓도 모두 그의 부수입 루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상당수의 불쌍한 외국인 여행자들은 스페인어로 쏘아붙이는 저 고약한 심사관에게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돈을 뜯겼다는 것이었고, 나는 아니었다.

내 스페인어가 완벽하거나 매우 유창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이런 부당한 상황에서 내 입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힘이었다.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크게 실감한 날이기도 했다.


버스는 이런 우여곡절이 일어났는 지도 모른 채, 승객들을 다시 싣고 다시금 칠레 칼라마로 향했고, 나는 칼라마에서 다시 아리카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고 타크나를 거쳐 모케구아까지 돌아갔다.




우유니만 겨우 맛보고, 볼리비아의 매력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이런 엿 같은 일을 겪었으니 - 그땐 볼리비아에 정말, 두 번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어느덧 9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씁쓸한 기억은 점차 흐릿해져가고, 대신 우유니 사막의 황홀한 풍경만 사진첩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머지 않은 미래에, 다시 그 꿈꾸는 듯한 풍경을 마주할 기회가 온다면 좋겠다.

그때는 더 친절한 볼리비아 사람들을 만나, 몇 년 전에 마음에 생긴 부정적인 얼룩까지 함께 지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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