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현대사를 걷어낸 나라의 수도이자 이민자들이 만드는 모자이크의 도시
1975년 칠레 출신 엘비오 소토 Helvio Soto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Il Pleut Sur Santiago> 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1973년 좌파 성향의 칠레 사회당 출신 살바도르 아옌데 Salvador Allende 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미국은 칠레 내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어 제 2의 쿠바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바탕으로, 군인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Augusto Pinochet 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담담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현한 1975년 작의 기록 영화다.
흥미롭게도 영화 제목은 당시 국영 라디오에서 쿠데타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내보낸 암호 문장,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실제로는 맑고 화창한 날이었지만, 그 말 이후 칠레는 마치 끝없는 장마처럼 오랜 시간 대낮에도 어둠을 걷는 듯한 군부 독재의 시대에 들어갔다. 아옌데 대통령은 모네다 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990년 제도적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침묵을 강요당한 채 고통받아야 했다.
길고 어두운 장마 같던 독재의 시간을 종식한 칠레는 구리와 리튬 등 풍부한 광물 자원, 그리고 천혜의 자연을 기반으로 경제와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왔고, IT 산업 등 첨단 산업 유치에도 힘쓰고 있다.
이렇게 산티아고의 비는 이미 그친지 오래지만, 그 비가 사람들의 기억까지 씻어낸 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씻기지 못한 진한 기억들은 여전히 도시에 남아 있었다.
역사 유적지와 관광 포인트가 모여있는 산티아고 센트로 지역에는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 궁 Palacio de La Moneda 이 있는데, 과거 조폐국이었기에 이렇게 스페인어로 '동전 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기념 사진을 남기는 도시 중심부의 평범한 관광지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한때 군부가 끌고 온 탱크의 포탄과 기관총 사격으로 뒤덮였다는 사실이다. 1973년 9월 11일,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친 바로 그 자리에서, 칠레의 군부 독재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아옌데가 쓰러지면서 깨진 그의 안경은 지금도 모네다 궁에 보존되어 있다.
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2010년에 세워진 곳이 기억과 인권 박물관 Museo de la Memoria y los Derechos Humanos 이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분위기는 급격히 무거워진다. 높은 천장 사이로 보이는 유리벽에는 군부 독재 시절 실종되거나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이 가득 걸려 있기도 하고, 미로 같은 통로 곳곳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역사들이 적혀있기도 하다.
박물관 내부는 그들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영상 기록과 당시 희생자들이 남긴 편지, 역사, 인터뷰 음성과 함께 — 억압이 아닌 ‘기억’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희생자의 사진들 남녀노소 다양했지만, 상당수가 대학생 나이의 젊은이이다. 이름, 고향 등의 정보와 함께 ‘행방불명 Desaparecido’이라는 단어도 함께 보였다. 너무나 앳되고 밝으면서도 굳건한 그들의 얼굴, 그리고 먼저 떠나간 그들을 평생 기다리며 그리워했을 그들의 가족과 연인,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많은 사진 앞에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칠레에 내리던 '보이지 않는 비'를 멈추기 위해, 어두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 비록 역사의 발자취 속에서 스러져 갔지만, 칠레 200주년을 맞아 지어진 이 박물관에서 현재 칠레 민주주의의 발판 조각이 되어준 희생자들을 만나며 역사 속을 걷는 시간을 보냈다.
분명 이 박물관은 과거의 산 증거지만,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어질 기억의 보존물이었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잊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박물관 전체 공간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렇게 과거를 기억하는 도시 산티아고는, 현재 각국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다문화의 도시가 되었다. 서로 다른 삶과 억양이 뒤섞이면서 이곳에서는 새로운 미래가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일찍부터 칠레는 여러 유럽계 이민자들이 뿌리를 내린 나라이다. 식민지 본국이었던 스페인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건너온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했고, 그 후손들은 오늘날 정치·경제·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칠레의 젊은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 Gabriel Boric 또한 크로아티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며, 내 칠레 친구의 부모님 역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해 칠레로 이민 온 분들이었다.
이런 기존의 유럽계 이민자 후손들에 더해, 이제는 새로운 이민의 물결까지 겹치지고 있다.
현재 남미 내에서 상대적으로 경제 상황이 어려운 국가들인 베네수엘라,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 그리고 카리브해의 아이티 난민들까지 더해져 - 산티아고의 거리는 더 다채로운 얼굴과 색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그들이 만드는 풍경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진다.
크기는 작지만 칠레에는 한인 사회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주로 파트로나토 Patronato 지역에서 의류와 잡화, 식료품 가게와 음식점 등을 운영한다. 이곳 한인의 규모는 약 2천명 정도로 작은 편이지만, 한인들이 기반을 잡은 파트로나토는 칠레 내에서 한국을 알리는 문화 구역으로서 칠레 사람들에게도 점차 알려지고 있다 한다.
칠레에서 만드는 한국식 치킨과 다소 낯선 파프리카 주스라니! 머나먼 땅에서 만들어진, 조금은 한국 같고 조금은 칠레 같은 그 절묘하고 독특한 맛이 지금도 여전히 생각난다.
피로 얼룩진 기억 위에 새살이 돋듯 다시 삶이 쌓이고, 새로 덧대어진 다양한 문화를 양분으로 산티아고라는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나 그들의 적응 문제, 사회 계층 속에서 주변화되는 등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이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 온 뒤 더 맑아지는 날씨처럼, 크고 작은 간극들을 견뎌낸 사람들이 만들어갈 햇빛이 - 이 모자이크 같은 도시를 고루 환하게 감싸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