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바람을 품은 대자연의 땅, 파타고니아 고행기

칠레 푼타 아레나스부터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까지

by Angela B

옛날에 알고 지내던 지인과 여행 수다를 떨다가, 그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파타고니아 Patagonia를 꼽아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지구상에 그런 곳이 있는 줄 처음 알았기에, 이후 관련 책을 찾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 풍경을 그려볼 수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모험을 꿈꾸는 많은 여행가들의 버킷리스트로 꼽히는 곳, 지구 반대편 최남단 세상의 끝에 있는 파타고니아. 안데스 산맥을 가운데 놓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두른 남위 40도 이남에 위치한, 칠레와 아르헨티나 두 나라를 모두 품은 지역이다. 지리적·기후적 특징으로 인해 빙하와 설산, 호수와 폭포, 다양한 식생이 공존하는 대자연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만날 수 있는, 바람과 얼음의 땅이기도 하다.


이곳이 어딘지도 몰랐던 나는 우연히 들은 그 한마디에 호기심이 생겨 여행 계획을 정했고, 실제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파타고니아 특유의 풍경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르헨티나에 살던 시절에도 그 아름다움이 그리워 시간을 짜내어 여러 번 이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 풀어놓을 이야기는, 칠레에서 내가 방문했던 곳 중 푼타 아레나스 Punta Arenas와 토레스 델 파이네 Torres del Paine W 트레킹 4일의 기록이다.




푼타 아레나스는 흔히 ‘칠레판 땅끝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마젤란 해협과 맞닿아 있는 칠레 최남단의 도시이자 항구로, 파타고니아 여행의 출발점이자 남극으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국경과 가까운 항구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칠레 해군의 주요 군사 기지이자 요충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시 크기 자체는 작아서, 웬만한 거리는 충분히 도보로 걸어다닐 수 있다.


내가 이곳을 찾았던 때는 1월 초였다. 한여름이라기엔 기온은 거의 영하까지 내려갔고, 하늘은 내내 흐린 데다 비가 오락가락했다. 바람은 쉬지 않고 거세게 불었다. 그러나 호스텔 주인의 말에 따르면, 이런 날씨는 파타고니아 기준으로는 한여름의 아주 따뜻한(?) 날씨라고 했다. 호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손을 꺼내면 금세 냉동육처럼 얼어붙고, 칼날 같은 바람에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한여름이라니. 극지방 파타고니아의 한여름은 매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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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중앙부와 아르마스 광장. 마젤란 동상 아래 원주민의 발이 빛나는 이유는 저 발을 만지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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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잘 조성된 비밀의 화원 같았던 푼타 아레나스 공동묘지. 믿기지 않겠지만 인기 관광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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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공동묘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썼던 글 https://brunch.co.kr/@sangaangelab/8 참조)



당시 내가 머물던 호스텔에는 이스라엘 국적의 여행자들이 여럿 함께 묵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비교적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끼리 몰려 다니며 밤늦도록 소란을 피우거나, 공용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허락 없이 꺼내 먹는 등 불편한 행동들이 이어졌다. 결국 참다 못해 언성을 높이며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부 이스라엘 배낭여행자들에 대한 여러 평가와 논란이 존재해 왔다. 저명한 여행 안내서인 『론리 플래닛』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조심스럽게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군의 의무 복무를 마친 직후, 정부로부터 지급받은 지원금을 바탕으로 장기간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말로만 듣던 이야기를 직접 겪고 나니, 그들과 감정이 좋게 남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그들과 언성을 높여 다투고 나서야, ‘악명이 있다’는 표현이 왜 생겼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파타고니아는 그들 사이에서 하나의 통과 의례처럼 여겨지는 여행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서는 이들과 관련된 크고 작은 마찰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코스에서 발생했던 산불 사건 역시 그중 하나인데, 이와 관련된 사진은 아래에 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는 마젤란 해협 투어나 티에라 델 푸에고 섬을 돌아보는 여러 일정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것은 단연 펭귄 투어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사람에게 지친 마음을 자연을 보며 풀기로 하고 투어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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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금지라서 찍지는 못했지만) 멸족된 원주민의 이야기와 그들의 유산이 있던 공간과 버려진 배가 쓸쓸함을 더하던 푼타 아레나스 근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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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도시 특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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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타 아레나스 출발 투어 중 하나인 펭귄 투어. 임금펭귄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후 아르헨티나까지 다녀오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는데, 참고로 칠레에서는 펭귄 보호를 목적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리를 엄격히 지정해 두고 있다. 그로 인해 칠레 땅의 펭귄들을 굉장히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펭귄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기도 해, 그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덕분에 펭귄들의 움직임과 생김새를 좀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비바람이 내리치 영하의 한여름을 보낸 푼타 아레나스에서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탄 뒤 푸에르토 나탈레스 Puerto Natales 로 향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파타고니아 최고의 트레킹 명소인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작은 도시로 - 각종 장비를 빌리는 렌탈샵이나 캠핑용 음식 등을 조달해서 가기 편하고, 트레킹하는 동안 숙소에서 큰 짐을 맡아주는 등 여행자 편의성이 좋다. (나같은 경우에는 호스텔에서 장비를 싸게 빌려준대서 스틱을 빌렸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가자마자 이 녀석이 부러지는 바람에 제 기능을 전혀 못하고 끝까지 들고 다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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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항구 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 중앙 광장의 성당과 한글로 '장비 대여'가 쓰인 렌탈샵



이 지역의 선주민이었던 테우엘체족의 언어로 파란색을 뜻하는 Paine '파이네'와, 스페인어로 봉우리를 뜻하는 Torres '토레스'가 합쳐져 '파란색의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토레스 델 파이네. 자연을 사랑하는 많은 여행객들이 꿈꾸는 이 국립공원 트레킹은 날씨로 인해 남미의 여름인 12월~3월까지가 성수기다.


이 국립공원 안에서는 허가 구역 외 캠핑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므로, 트레킹 코스 근처에 있는 산장 도미토리나 캠핑 사이트(혹은 캠핑장에 설치된 텐트) 등을 미리 예약해두어야 한다. 당시 나는 혼자서 트레킹을 도전하는 거였기에 캠핑 장비같은 짐을 줄이고 싶었고, "힘든 트레킹 중이니 무조건 잠은 따뜻한 곳에서 편하게 자야한다"라는 생각에 산장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자리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약 4-5개월 전에는 예약하는 걸 추천한다.)


대략 3박 4일을 꽉 채워 진행하는 W 트레킹은 '동에서 서로' 움직일 지, 아니면 '서에서 동으로' 갈지 방향에 따라 출발점이 다르므로 산장도 여기에 맞게 예약해야 한다. 보통 가이드북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행하는 것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걸을 수 있고, 이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라스 토레스 전망대 Mirador Las Torres 를 마지막 날 보고 하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동쪽에서부터 출발해서 서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는데 - 어차피 어느 방향이든 심하게 불어댈 바람보다는 강한 해를 등지고 걷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다는 삼봉 코스를 첫째 날에 빨리 끝낸 뒤 나머지 트레킹은 좀더 쉽게 즐기고 싶었다.


산장 예약할 때 식사 서비스를 포함할 수 있는데 저녁과 아침 식사가 포함된 하프 보드 Half Board, 아니면 모든 식사를 포함한 풀 보드 Full Board 등으로 구별하여 선택할 수 있다. 물론 한 끼당 30달러가 넘는 금액으로 매우 비싼 편이지만, 대신 재료와 조리도구가 필요 없으므로 짐이 줄어든다는 장점이 크다. 그래서 나는 밥이 맛있다는 후기가 있는 산장은 풀 보드로, 나머지는 하프 보드로 신청한 뒤 산티아고에서 조달해 온 컵라면과 동결국, 햇반 등을 준비했다. (일행이 있는 경우면 좀더 선택지가 다양할 것 같다.)





파타고니아는 사계절이 하루에 있는 극심한 날씨 변화가 도드라지는 지역인데다,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탓에 때로는 트레킹 자체가 매우 위험해진다. 내가 갔을 때는 한 여행객이 갑자기 심한 돌풍 때문에 몇 미터를 날아가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는 아찔한 사고가 있었다. 그래서 레인저들이 수시로 돌면서 특정 트레킹 코스를 막기도 하고, 날씨가 정말 좋지 않은 날에는 모든 입산 및 트레킹이 전면 취소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무리 날씨가 구려도 산장에 자리가 없으면 나와야 하므로, 내 동생과 친구가 겪었던 것처럼 몇 시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 다음 코스로 반드시 트레킹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도 예사다. 나의 여행 중 날씨운은 굉장히 좋은 편이지만, 이렇게 변덕스러운 파타고니아에서는 내 운을 딱히 장담할 수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삼대가 덕을 쌓아야지만 본다는 토레스 델 파이네 삼봉. 그리고 나의 일정 내내 날씨운이 좋길 바라면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을 시작했다.




트레킹 첫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약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라구나 아마르가 웰컴 센터 Portería Laguna Amarga에서 먼저 등록을 한 뒤, 미리 예약해 두었던 라스 토레스 산장 Refugio Las Torres / Torre Central에 짐을 내려놓았다. 간단한 먹거리와 물만 챙겨, 여기서부터 토레스 삼봉을 왕복으로 다녀오는 코스에 나섰다.


여기서 왕복으로만 8~9시간이 걸리는 길고 험난한 구간이었다. 일정이 빠듯하거나, 며칠씩 이어지는 트레킹이 부담스러운 여행자들에게는 핵심 하이라이트인 라스 토레스 삼봉만 보고 오는 당일치기 트레킹 코스로 특히 인기가 많은 코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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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동쪽 출발점 라구나 아마르가 Laguna Amarga 웰컴 센터와 곳곳에 보이는 이정표. 길이 어렵지 않게 잘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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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 올라가는 길에 마주친 야생여우



라스 토레스 전망대로 향하는 트레킹 구간은 처음에는 너른 평지를 지나지만, 점점 오르막으로 바뀌고 마지막에는 돌산으로 이루어진 급격한 경사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코스 중간에 있는 칠레노 산장 Refugio Chileno 이후로는 매우 가파른 오르막이며, 가는 길이 모두 돌길이라 미끄러운데 바람까지 많이 불어 위험하므로 매우 조심히 걸어야 했다.


걷다가 만난 트레커들과 함께 끝이 없는 듯 험악한 돌길을 계속 걷다가 - 정말 이러다 숨차서 안데스의 별이 되는게 아닐까 싶을 때 - 기적처럼 멀리서 세 개의 거대 봉우리가 보였다. 그 때부터 저 삼봉을 내 눈에 직접 담기 위해 힘을 내어 쉼 없이 꾸준히 올라갔다. 그렇게 영접한 토레스 삼봉! 정말이지 다리 뿐만 아니라 온몸이 얻어맞은 듯 후들거리는 아찔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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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날씨가 꽤 좋아서, 그 유명한 삼봉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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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던 이들과 남긴 토레스 삼봉의 추억
IMG_3163.jpg 이 사진은 한동안 나의 카톡 프사 사진이 되어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며 올라왔는데!' 라는 생각으로 오르막을 올라온 힘듦도 잊고 삼봉 주변 호수를 돌고 계속 사진 찍으며 한참 놀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뿅!"하고 나타났는지 모를 국립공원 레인저가 갑자기 등장했다. 엄격해보이는 인상의 그는 "지금 하산하지 않으면 금방 어두워져요." 라며 위험하니 얼른 내려가라고 경고했다. 그는 헥헥대며 금방 올라온 사람에게도 자비가 없어서, 그들은 정말 불쌍하게도 겨우 사진만 찍고 다시 쫓기듯 내려가야 했다.


최대한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돌길을 천천히 내려가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파타고니아는 기본적으로 고위도 지역이라 해가 빨리 지지 않는다. 보통 산에서라면 일곱 시쯤에는 해가 완전히 지기도 하겠지만, 파타고니아는 그래도 훤한 낮이다. 어쩌면 레인저는 정말로 위험을 걱정한 게 아니라, 그저 퇴근을 조금이라도 빨리 하기 위해 여행객들을 가차 없이 내려보낸 건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며 내려가는 길에, 여기서 몰래 캠핑하려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레인저에게 쫓겨나는 어떤 용자(?)를 보기도 했다. 아니, 그나저나 이 레인저들은 어디서 자꾸 나타나는 걸까? 그들에게 의문이 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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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레인저에게 경고를 먹기 전에 허겁지겁 내려왔는데, 이 사진을 찍은 시간은 대략 밤 아홉 시였고 아직 훤하다.



여튼 천천히 내려가느라 뒤늦게 들어간 라스 토레스 산장 레스토랑에서 겨우 저녁을 먹고 있다가, 우연히 합석하게 된 여행자들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들도 막 라스 토레스 전망대에 다녀온 길이었다. 우리가 이룬 업적을 스스로 칭송하며 한참을 신나게 떠들다가 이들과 내가 일정이 거의 같다는 걸 발견했고, 그리하여 우리는 남은 일정 동안 함께 걷기로 했다. 길동무가 생겨서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 첫날 마무리였다.




둘째 날 코스 역시 대략 20km가 넘는 거리였다. 갈 길이 먼 우리는 새벽녘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약해 둔 로스 쿠에르노스 Los Cuernos 호수까지는 비교적 평이한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길 옆에 있는 스웨덴의 탐험가 이름을 따 붙여졌다는 아름다운 노르덴스쾰드 호수 Lago Nordenskjöld 를 지나며 풍경을 감상했다. 이날 오전은 정말 날씨가 좋아 바람도 세지 않았고, 햇볕도 따스했다. 이때는 '천국을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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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의 트레킹 메이트가 되어준 덕에 힘들다는 생각 없이 즐겁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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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내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



쿠에르노스 산장에 도착하고 잠시 쉬고 난 뒤, 이번에는 이탈리아노 체크포인트 Guardería y Camping Italiano (현재는 폐쇄됨)를 지나 브리타니코 전망대 Mirador Británico 를 보러 가기로 했다. 여기로 가기 위해서는 프란세스 계곡 전망대 Mirador Valle del Francés 로 먼저 올라가야 했는데, 이 길 역시 어제와 맞먹을 정도로 가파른 산비탈길이었다. 소처럼 묵묵히, 그리고 말처럼 빠르게 가는 서양인인 나의 길동무들은 마치 날다람쥐처럼 산을 올라갔지만, 오르막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전날의 여파까지 겹쳐 너무 힘들었기에 거의 네 발로 기어가듯 올라가야 했다.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해지던 중, 갑자기 맑던 하늘에 새카만 구름이 몰려들며 주변이 어두컴컴하게 바뀌는게 아닌가. 곧이어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나무 밑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그칠 기미는 없었고, 결국 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시 산장 쪽으로 천천히, 절뚝절뚝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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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 속 모르도르 마냥 날씨가 음산하기 짝이 없었던 프란세스 전망대 주변. 하지만 내려오니 살살 구름이 걷혔다. 그 주변만 날씨가 이상했던 것 같다.
IMG_3304.JPG 이탈리아노 체크포인트에 적혀있던 대략적인 날씨 정보. "날씨에 대해 묻지 마세요. 우리는 파타고니아에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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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 섞인 비을 맞으며 산장 근처로 내려오니 거짓말 같이 맑아진 날씨. 얼음같이 차가운 빙하 호수에서 발을 담그기도 하고, 만년필로 그림도 그리며 잠시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몇 시간 뒤에 피곤한 몰골로 산장에 나타난 친구들은, 결국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하지만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혀 원하던 풍경은 보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트레킹한 사람이 되었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 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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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챙겨온 저렴한 팩와인을 함께 나눠 마시며, 함께 산장에 있던 여행객들과 좋은 풍경을 보며 다함께 스트레칭을 했다.



저녁의 산장에서는 다함께 스트레칭을 길게 하고, "어떤 악당이 자기 신발은 놔두고 내가 산 트레킹화를 훔쳐갔다."며 속상하고 억울해하는 여행객의 푸념을 들어주었으며, 연이틀 강도 높은 트레킹으로 인해 피곤했는지 코를 고는 사람들의 합주를 들으며 잤다. (잠이 들어버렸으니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나도 그 합주 대열에 합류했을 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날은 여기에서 페오에 호수 Lake Pehoé 옆 파이네 그란데 산장 Refugio Paine Grande 까지 걷는 일정이었다. 트레킹의 기본은 보통 해 뜰 무렵 일찍 출발해서 일찍 마치고 푹 쉬는 것이기에, 이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길을 나섰다.


감사하게도 이날 역시 날씨가 무척 좋았다. 친구들과 나는 "우리는 정말 운이 좋다"를 연신 반복하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걸었다. W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 연이틀간 걸은 거리를 계산해보니 거의 50km 에 가까웠고, 그 사이 거친 오르막도 몇 차례 넘고 나니 이날의 오르막길은 나름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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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출발하며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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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페오에 호수를 벗삼아 걷는 길. 천국이 있다면 아마 파타고니아를 닮았을 것이다.



2011년 12월 말, 허락되지 않은 구역에서 쓰레기를 태우려던 한 이스라엘 여행자의 부주의로 인해 이 아름다운 국립공원에는 약 두 달간 최악의 산불이 이어졌다. 건조하고 바람이 거센 파타고니아 특성상 불길을 잡는일은 매우 어려웠고, 모든 이가 힘을 합쳐 아주 힘들게 진압했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캠핑장 내 지정 조리 공간 이외의 모든 화기 사용은 절대 엄금, 그리고 처벌 역시 한층 더 엄격해졌다.


하지만 이미 잃어버린 자연을 회복하는 데는, 산불이 났었던 두 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한 구역을 뒤덮은 앙상한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화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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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자연과 기후 조건으로 인해 복원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속상한 마음을 안고 이곳을 태워버린 정신 나간 놈을 욕하면서 걷다보니, 어느덧 페오에 호수 옆 파이네 그란데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나다니. 나는 이미 60km가 훌쩍 넘는 거리를 걸었고, 내일이면 벌써 이 아름다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IMG_4640.JPG 산장으로 가는 마지막 코스에 갑자기 돌풍같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 이때 정말 조심하며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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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온 듯, 도착하고 짐을 풀자마자 길게 낮잠을 잤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먹을 수 있는 식사 기준으로는) 아주 거한 저녁을 함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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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들과 함께 트레킹 필수 구간을 다 넘은 기념으로 산장 풀보드 식사와 함께 축하했다.


이렇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통과하는 W 트레킹의 필수 구간은 전부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은 오전에 그레이 빙하 Glaciar Grey 쪽을 돌아본 뒤, 오후에 페리를 타고 푸데토 선착장 Puerto Pudeto 으로 가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여기까지 사고 없이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건, 다행히도 날씨가 도와준 덕분이라며 서로를 격려했다.




마지막 넷째 날. 가방을 모두 정리한 뒤 산장에 큰 짐을 맡기고, 가볍게 그레이 빙하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새벽에 눈을 떴을 때부터 예감은 매우 좋지 않았는데, 일어나기조차 힘들 만큼 하늘이 잔뜩 흐렸기 때문이다. '과연 이 날씨에 걸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채,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우리의 날씨운은 어제까지였던 것이다.


여벌로 챙겨온 있던 옷을 몽땅 꺼내 입어도 이를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던 이날 날씨. 산장에서 나서자마자 아주 차가운 비가 쏟아졌고, 그 비는 이내 조약돌만한 우박으로 변해 트레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대 형벌 중 하나인 투석형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맞아가며 버티다, 우리는 겨우 그레이 빙하 전망대 부근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가는 건 무리였는데, 어째 우박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온라인 게임에서나 보던 얼음 공격 마법을 사방에서 당하는 듯한 기분에, 더 이상 이를 무시하고 가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짓 같아서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거의 뛰어가다시피 빠르게 산장 방향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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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그레이 빙하를 포기하고 선착장으로 가면 된다지만, 저 선너머에서 반드시 여기로 건너 와야만 하는 트레커들은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리고 곧이어 비와 우박, 바람이 모두 뒤섞여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한꺼번에 덮쳤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산장으로 돌아와 서둘러 짐을 챙긴 뒤, 선착장으로 이동해 오후에 출발하는 배만 기다리며 몇 시간 동안 그저 침묵 속에서 보냈다.


혹시나 배가 뜨지 못하는 건 아닐지 다들 매우 걱정했는데, 이 지역은 이런 날씨가 드문게 아니라서 비교적 큰 배로 움직이고, 호수도 깊고 잔잔한 편이라 항해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며 위로 섞인 설명이 이어졌다. 다행히도 기다리던 배는 예정대로 푸데토 선착장에 도착했고, 우리는 조용히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하필 딱 마지막 날에 비가 퍼붓고, 창문이 깨질 듯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헤어질 때 길동무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조차 운이 매우 좋았던 것이, 이 마지막 날부터 국립공원 내 날씨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얼마간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이 전면 취소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날 들어갔다가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돌아온 다른 여행자 분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늘의 허락을 받아, 잠시 파타고니아에서 천국을 맛봤던 건 아닐까.

그 맛보기 한 입을 위해, 그토록 고행을 견뎠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때 주어진 고행조차, 내게는 오래도록 고맙고 소중한 여행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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