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칠레 산티아고 (2) 산처럼 추억을 두른 도시

도시 전체를 두른 안데스처럼, 내겐 다양한 추억과 사람이 깃든 곳

by Angela B



호스텔에 걸려있던 칠레식 스페인어. 아르헨티나 스페인어 못지 않게 특이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들이 있다.



산티아고는 다양한 이유로 인해 내가 가장 많이 방문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도시 중 하나다. 옛 사랑과 만나 감정을 키우고 만났던, 칠레 여행 중 필요한 한식 수급을 위해 기꺼이 들르는, 내 소중한 칠레 친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인 도시.


스모그와 구름에 가려진 안데스의 능선, 그 아래 빽빽하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이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는 이 도시에서, 내 추억도 저 산처럼 겹겹이 쌓여갔다. 이렇게 산티아고 시내와 주변을 돌아다니며 쌓은 추억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정리하여 풀어본다.




산티아고 시내는 언제 어디를 가도 활기가 넘친다.

역사 지구인 구도심 센트로를 비롯해, 예술과 힙스터 감성이 가득한 베야비스타 Bellavista 구역, 금융업이 밀집되어 일명 ‘산하탄 Sanhattan(산티아고와 맨해튼을 합친 단어)’이라 불리는 라스 콘데스 Las Condes, 그리고 중상류층의 생활권인 프로빈시아 Providencia까지 - 이렇게 각기 다른 리듬을 가진 동네들이 북적이며 이 도시의 매력을 더욱 짙게 만든다.



여름철 남미 길거리에서는 썰어서 파는 컵수박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당시 한화로 대략 이천원 정도였음.
각종 역사적 건물이 즐비한 센트로 구역과, 센트로 근처에 있는 산타 루시아 전망대. 예전에는 요새였다고 한다.
커다란 성모상이 있는 산 크리스토발 언덕 전망대.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이날 하필 햇볕이 가장 강한 날에 올라와서 사진이 별로다.



산티아고 시내 전체를 내려다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센트로 구역의 산타 루시아 전망대 Cerro Santa Lucía, 그리고 약간 시외로 나가서 도시 전체를 조망하는 산 크리스토발 언덕 Cerro San Cristóbal, 그리고 남미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알려진 그란 토레 산티아고 Gran Torre Santiago 의 61-62층 전망대 스카이 코스타네라 Sky Costanera 등이 있다.


끝없는 팜파스 평원 속에 자리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는 달리, 안데스가 병풍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티아고의 풍경은 내게 한국에 두고 온 여러 도시들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가본 산티아고의 여러 박물관이나 역사적 장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의외로 중앙 우체국 Correo Central 이었는데, 이 안은 우편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 안에 놓여있는 정말 각양 각색의 다양한 전시품들과 우표들은 이런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는 한 역사 덕후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놀라운 건 각국에서 가져온 우표 세트였는데, 칠레와 중남미 국가들 뿐만 아니라 정말 말그대로 세계 각국의 우표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방대한 양의 북한 우표들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던 북한 우표들을, 그것도 지구 반대편 칠레의 한 박물관에서 마주하다니! 순간적으로 반갑고, 또 묘하게 낯선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이 생경한 감정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사진으로 이들을 남겼다.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 깊은 북한 우표 시리즈
'주체사상'이라는 단어를 칠레 우편 박물관에서 볼 줄이야



북한의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우표, 삵과 표범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씩씩거리며 등장하는 우표 옆에는 미제를 쳐 부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며 주체사상을 완성하라는 선전 우표들이 ‘짠’ 하고 튀어나오는 기묘함이라니. 다양한 북한 우표들을 보는 게 재밌기도 했지만, 뭔가 현실 같지 않았던 칠레 산티아고의 어느 오후였다.



칠레는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나라답게, 특히 유럽 각국의 요리·술·디저트 문화가 골고루 들어와 있다. 긴 해안선을 자랑하는 국가답게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도 많으며, 특히 산티아고 근처는 풍부한 일조량과 건조한 기후 덕분에 와인 생산에 최적화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콘차 이 토로 Concha y Toro 와 카시예로 델 디아블로 Casillero del Diablo 같은 유명 브랜드가 바로 이 칠레산 와인들이다. 또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은 토마토와 아보카도, 양파를 잘게 썰어 각종 소스를 잔뜩 끼얹은 핫도그 콤플레토 Completo, 그리고 남미의 국민 간식인 엠파나다 Empanada 같은 비교적 소박한 요리들이다.


그러나 온갖 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 먹는 한식에 익숙한 한국 사람에게는 -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 칠레의 자체 요리 문화가 화려하거나 풍부하다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느낌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산티아고에 오면 결국 한식을 더 자주 찾게 되었다.


대신, 칠레에는 분명히 압도적 장점이 하나 있다. 과일이 정말 맛있다. 특히 여름철 과일인 세레사 Cereza (스페인어로 체리)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달고 싱싱해서, 눈에 띌 때마다 시장에서 한 봉지 사다가 숙소에서 우적우적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알고 지내던 친구, 연인, 지인들과 한인 타운에서 부지런히 먹고 마셨던 기억
절대 잊을 수 없는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칠레산 과일 맛




산티아고 서쪽 근교로 나가면 가볼 만한 곳들 중 하나가 발파라이소 Valparaiso 이다. 언덕 위에 올라가 있는 다양한 색깔의 집들과 알록달록한 벽화들, 파블로 네루다의 집을 위시한 예술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인 도시다. 그런데 어쩐지 나에게는 기시감이 들었는데, 자꾸만 항구도시 부산 감천마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산처럼 바다와 항구를 낀 도시이기도 한 발파라이소는, 어쩌면 남미의 거대한 감천마을이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런 예쁜 첫인상 뒤에는, 이곳이 생각보다 치안에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언덕이 많고 골목이 복잡해 길을 잘못 들면 주민조차 발길을 잘 두지 않는 외곽으로 빠지기 쉽고, 낮에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리지만 해가 지고 나면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진다. 게다가 골목마다 분위기가 매우 다르므로, 길이 조용하다 싶으면 빨리 나오는 게 좋다. (마주치는 현지인들조차 여기서는 늘 조심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 발파라이소 관광은 보통 산티아고에서 하루를 투자해서 오는데, 대부분 어두워지기 전에 마치고 돌아오는 편이다.



마치 감천문화마을을 보는 것 같던 발파라이소 풍경




산티아고 동쪽으로 나가면 바다와 항구의 색채와는 전혀 다른, 안데스 골짜기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쪽으로 이어지는 길 끝에는 강을 두른 아름다운 카혼 델 마이포 Cajón del Maipo 협곡이 있다. 아르헨티나 멘도사 주와 국경을 맞닿은 이곳은 보통 차를 렌트해서 가거나 여행사 투어로 다녀올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호스텔에서 만난 브라질 여행자들에게 갑자기 간택을 당해, 얼떨결에 함께 다녀오게 되었다.


도시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갑자기 산의 높이가 달라지고, 산능선이 깊어지며 안데스 산맥의 결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안데스의 골짜기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마침내 눈부신 파란 물빛의 예소 댐 Embalse El Yeso 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티아고 사람들의 식용수로 쓰인다는 맑고 깨끗한 물답게, 터키색 물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터키석처럼 빛나는 거대한 호수,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뚜렷한 산맥의 색감. 카혼 델 마이포는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게 믿기 않을 정도로 거대한 대자연 그 자체였다. 웅장한 풍광 덕에 남미 유명 가수의 뮤직비디오나 영상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라니, 기회가 되면 방문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카혼 델 마이포 주변 풍경
맑고 깊고 푸른 예소 댐의 물







페루 시절과 유학을 거쳐 다시 남미에 온 나는, 드디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유학 시절 칠레 친구들을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다. 친구들은 모두 프로빈시아 동네에 살며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들었던 것처럼 이곳이 칠레의 중상류층 이상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게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산티아고는 동부가 잘 살고, 서부가 가난하다고 한다.)


런던에서 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중에는 박사를 하기 위해 런던에 남은 친구도 있었고, 산티아고 직장에서 오퍼가 들어와 취직한 친구도 있었다. 인스타그램과 왓츠앱을 통해 종종 소통하던 나의 친구들. 그때로부터 어느새 5년이 넘게 흘렀고, 이렇게 어렵사리 다시 만나는 친구들의 얼굴과 이야기가 정말 너무나 반갑고 소중했다.



박사과정을 무사히 졸업하고 박사가 되어 고향 산티아고의 유명 대학에서 조교수로 취직한 친구를 축하하며!
친구네 직장 근처로 가는 길
프로빈시아 동네 주변 산책하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던 12월. 하지만 가장 무더운 때이기도 했다.
처음에 직장을 잡지 못해 방황하던 친구가 무사히 NGO 쪽에 취직했고, 얼마 전부터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도 생겼단다. 칠레 전통식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이번에 본 칠레 친구 중 런던에서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인 A. 대학원에서 번호순으로 내 성과 그의 성 알파벳이 앞뒤로 붙어 있어 얘랑 조모임을 쭉 같이 하게 된 게 인연이 되었다. 직장에서 유학을 보내준 그와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온 아내 C,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까지 - 나는 종종 그의 가족과 한번씩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쩌다보니 내향인 수집가가 된 내가 만난 극강의 내향형 또래 친구. 얼마나 내향적이었냐면, 내가 아니었으면 정말이지 이놈은 여기 대학원에서 친구나 한 명 사귀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의 아내 C가 나에게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고 말할 정도였다.


얘는 인스타도 안하고 왓츠앱도 번호가 바뀌었는지 영 연락이 힘들었는데, 어느날 기적적으로 연락이 닿았다. 그렇게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 받다가 칠레에서 만나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날 집으로 초대해서 어찌저찌 찾아갔는데, A가 버스 정류장 근처까지 직접 마중을 나와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포옹을 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걸어가며,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실컷 나누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A와 C가 번갈아 내어오는 맥주를 마시며 흥이 오르고, 온갖 옛날 이야기와 근황이 다 나오던 중 나는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칠레로 올 테니 시간 되면 보자"는 내 메시지를 보고, 내 친구 A는 오랜 친구, 그러나 보기 힘든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그날부터 잠도 안 자고 기뻐하며 설레어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하는 아내를 쳐다보며 멋쩍게 웃는 A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났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저 목각인형 같은 놈이, 속으로는 늘 한국에 있는 친구인 나를 응원하고, 칭찬하며 보고 싶어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표현이 적고 서툴러서 말도 별로 없는 내 친구. 하지만 그가 내게 보여준 행동은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한 마음이었다.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서 밤늦도록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칠레까지 전해진 K-하트



이렇게 유학 시절 만난 칠레 친구들과 몇 년만에 다시 듬뿍 정을 주고 받으며 마음의 온기를 채웠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삶을 위해 흩어졌지만, 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서로의 궤도 안에서 계속 돌고 있었다. 시간과 거리가 아무리 멀어져도 마음 속으로는 서로에게 닿아있어, 꾸준히 각자의 인생을 응원하며 지냈다는 걸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깨달았다.


이렇게 수많은 추억이 깃든 도시 산티아고.

나는 언젠가 그들을 만나러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리고 다음엔 더 긴 시간을 여기서 함께 보낼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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