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상에서 가장 외딴 곳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역사와 신화,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라파누이(이스터 섬)에서의 나날

by Angela B


지구상에서 가장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알려진, 남태평양 화산이 만든 아주 독특하고 신비로운 섬, 이스터 섬.스페인어로는 '이슬라 데 파스쿠아 Isla de Pascua' 라고 불린다. 1700년대에 유럽인이 최초로 이 섬을 발견한 날이 부활절이었기에 '이스터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토착 원주민어로는 '라파누이 Rapa Nui'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스터 섬'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라파누이'라는 이름을 훨씬 더 선호한다. 이 글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라파누이'와 '이스터 섬'을 함께 번갈아 사용하고자 한다.


폴리네시아 문화권에 가까운 라파누이는 거대한 모아이 석상들로 대표되는 역사와 신화, 그리고 미스터리가 가득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곳답게 화산 지형과 목초지가 함께 펼쳐진, 제주도보다 작은 크기(섬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편도로 넉넉잡아 40~50분 정도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의 예쁜 섬이다.


문화와 자연이 뒤섞여 멋진 조화를 이루는 이스터 섬은 나의 아주 오랜 버킷리스트였기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으나, 페루 시절에는 이래저래 기회가 없어 가지 못했다.


우선 칠레를 대표하는 항공사인 라탐(LATAM)이 산티아고발 이스터 섬행 비행편을 독점 운항하고 있어 항공권 가격이 비싼 편이다. 산티아고에서 출발해 편도로만 5~6시간 가까이 걸릴 정도로 거리가 멀고, 칠레 본토와는 시차도 2시간 차이가 난다. 오가는 비행편 역시 하루에 한두 편에 불과해 시간 계산을 잘해야 한다. 이렇게 이동에만 하루의 반나절 이상이 소요되니, 일정에 여유를 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이스터 섬 여행을 포기하고, 언젠가 다시 남미에 와서 라파누이 문화와 전설을 직접 알게 될 기회가 닿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 운좋게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게 되었고, 3년의 파견 근무를 치고 떠나기 직전인 작년 여름방학 크리스마스 연휴 전후로 일주일 가량 시간을 내어 이스터 섬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 글은 작년의 기억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해 옮긴 것이다.)




내가 남미에서 타본 국내선 비행기 중 가장 좋은 비행기를 타고(사실 칠레 국내선이라고는 하지만 왠만한 남미 국제선만큼이나 거리가 먼 데다가, 유명 관광지라 그런지 비행기 상태가 아주 깨끗하고 기내식도 풍족하게 잘 나왔다.) 도착한 이스터 섬.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여름 휴가(북반구에서 온 사람들은 겨울 휴가)를 맞아 이곳을 찾은 사람들로 굉장히 분주했다. 모든 라파누이 사람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공항에 비행기가 들어오는 스케줄이 딱딱 정해져 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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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가 로아 공항과 내가 받은 꽃목걸이. 그리고 주요 관광포인트가 표시된 라파누이 지도


라파누이의 중심 마을인 항가 로아(Hanga Roa)에 있는 숙소에서 마중을 나오기로 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같은 숙소를 예약한 다른 여행자 한 명을 우연히 더 만나, 함께 픽업을 기다리게 되었다.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일정에 같은 숙소까지 우연히 함께하게 된 홍콩계 캐나다인 친구 T. 그는 나와 일정이 하루 차이로 거의 같아, 결과적으로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트래블 메이트가 되어 주었다.


이윽고 도착한 숙소 주인은 우리에게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었다. 폴리네시아 문화권에서는 방문자에게 환영의 의미로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향긋하게 퍼지는 이국의 꽃향기를 맡으니 기분이 무척 좋았고, 이스터 섬에서 보낼 나날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마우이를 연상케 하는 숙소 주인은, 이곳의 진짜 토착민인 라파누이인이었다. 그런 그의 모국어 역시 라파누이어로, 가족들과는 라파누이어로 소통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배운 스페인어가 유창해 나와의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친절한 주인이 설명해주는 지리 정보와 관광 정보를 들으며 이틀치 투어 예약을 했다. 이스터 섬의 주요 관광지들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여행사 투어를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옆에서 조용히 나의 통역을 듣던 T도 따라가고 싶어해 함께 예약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곳은 카드 결제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 현금이 꽤 필요한데, 그는 이 점을 미처 알지 못해 현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스터 섬에는 이런 관광객들이 워낙 많아 ATM에 현금이 부족하거나 기계가 고장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단다.) 결국 내가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아무래도 곧 휴일이 시작되니 은행에 서둘러 다녀오는게 좋겠다는 주인의 조언에 따라 T와 함께 마을 구경도 할 겸 중심지 쪽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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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가나 거리나 집에 있는 독특한 문양, 그리고 크고 진한 색깔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여기가 정말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섬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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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의 중심지, 항가 로아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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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마을 중심부에 있는 아후 호타케 Ahu Hotake. 이스터 섬에서 '아후 Ahu'라는 낱말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아이를 받치는 돌로 만들어진 제단을 뜻한다고 한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T와 역사덕후인 나는 마을 중심부 쪽으로 나오자마자 감격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모아이 Moai 를 드디어 맨눈으로 직접 보다니!


라파누이어로 '동상', '석상'이라는 뜻의 모아이는 대략 1200년대부터 유럽인들이 당도하기 훨씬 전인 1500년대까지, 돌을 가공해 죽은 자의 살아생전 얼굴 형태를 본떠 만든 거대한 석상들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였으나, 점점 모자나 장식, 개별적인 특징들을 더해 차별화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고 한다. 모아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살던 커뮤니티를 마주 보도록 세워졌는데, 이는 마치 마을 위 양지바른 곳에서 남은 후손들을 굽어 살피라는 라파누이식 선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석상이 만들어진 시기를 제외하고는 - 라파누이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다고만 특정할 뿐, 정확히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이 믿을 수 없는 멋진 풍경을 눈으로 보기 위해, 이토록 먼 남태평양의 외딴 섬까지 온 거라고 자축했다. 같이 남태평양 바닷가를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T는 먼저 숙소 쪽으로 돌아갔고, 나는 해안선을 따라 쭉 걸으며 곳곳에 놓여있는 모아이들을 하나씩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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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형태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모아이와 형태가 다 닳아 없어진 모아이, 모자를 쓴 모아이와 모자를 쓰지 않은 모아이, 머리만 남아있는 모아이와 몸통까지 온전한 모아이, 돌의 재질에 따라 붉거나, 회색이며, 새까만 모아이까지 - 해안선을 따라 다양하게 늘어선 수많은 모아이들을 보며, 정말로 내가 역사와 신화의 섬에 당도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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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보는 무궁화 닮은 꽃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T였다. 이와 비슷한 일이 여기 머무는 동안 종종 있었는데, 작은 섬에서는 이런 우연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



처음으로 와 본 밝고 화사한 색채의 남태평양,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는 모아이들.

이러한 낯설음이 주는 생경한 기분을 안고 T와 함께 일몰 포인트인 아후 타하이 Ahu Tahai 쪽으로 나갔다.


아후 타하이는 항가 로아 마을 중심지에서 약 20~30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해안가 모아이 군으로, 특히 모아이들 사이로 내려앉는 일몰 풍경이 매우 유명하다. 도착해서 주변을 슬슬 걷다보니 숙소에 있던 사람들과 아까 비행기와 공항에서 스쳤던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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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후 타하이는 항가 로아에서 가까운 서쪽 해안에 있는 최고의 일몰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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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있는 공동묘지



그러나 이날은 오후 늦게부터 구름이 많이 끼었고,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리는 급하게 숙소로 철수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우리에게는 아직 며칠이 더 있으니, 하늘이 하는 일에는 좀 더 느긋해지자며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부터 이어지는 투어를 위해 얼른 준비하고 잠이 들었다.




이스터 섬의 투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필수 투어는 크게 두 가지인데 섬의 서쪽에 있는 항가 로아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도는 투어와 서쪽과 남쪽을 도는 투어로 나뉜다. 섬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차를 빌려서 이 섬을 돌아다니는 방법도 좋지만(이 섬이 언덕이 많아서 자전거로는 생각보다 다니기 힘들었다), 문제는 렌트카로 도착한 유명 유적지를 입장할 때다. 예전에는 가이드가 없어도 입장료만 내면 상관없었다지만, 지금은 공식 가이드 동행 없이는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다. 물론 도로가나 민가 주변에 듬성듬성 있는 중소규모의 모아이나 등산 코스, 해변 등은 렌트카로도 충분히 다 갈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이스터 섬 여행 일정은 3박 4일 정도가 가장 흔한데 - 하루는 항가 로아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후 이틀을 나누어 섬의 동쪽과 서쪽을 다녀온 뒤 남은 일정은 렌트로 구석구석 돌아보는게 일반적이다.


내가 이날 간 일정은 서쪽과 남쪽 위주로 도는 투어였다.

· 이스터 섬에 있는 모아이 중 유일하게 해변을 바라보는 7개의 모아이 아후 아키비 Ahu Akivi 를 시작으로

· 라파누이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다는 용암 동굴 거주지 아나 테 파후 Ana Te Pahu

· 일부 모아이가 쓰고 있는 붉은 모자들의 재료들을 캐내던 채석장 푸나 파우 Puna Pau

· 라파누이의 역사와 신화가 깃든 신성한 장소 오롱고 Orongo

· 마지막으로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분화구 라노 카우 Rano Kau 순이었다.


(이제부터는 사진이 더 많은 설명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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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들은 보통 바다를 등지고 섬쪽을 바라보는데, 아후 아키비 모아이만이 특이하게도 바다를 향해 놓여있다. 춘분과 추분 기 태양 각도 등 천체의 방향과도 관련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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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이 모아이들은 조상들의 얼굴을 조각했거나 혹은 이 섬이 정복되기 전 이곳에 도착했던 일곱 명의 탐험가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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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근래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아나 테 파후. 가이드의 할머니가 어렸을 적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동굴은 컸지만 굉장히 어두웠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가늠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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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장 푸나 파우에는 각종 돌들과 조각하다가 만 모아이들의 얼굴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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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경쟁하듯 모아이를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제작이 갑자기 멈추었다고 한다. 그 이유 역시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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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누이의 영적 정수가 집약된 의식의 마을이자 성역이었던 오롱고. 여기서 탕가타 마누 Tangata Manu, 즉 새 인간 Birdman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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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씩 저기 보이는 작은 섬에서 바닷새의 알을 가져오는 의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섬을 통치하는 버드맨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저기까지 직접 헤엄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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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아름다운 분화구 라노 카우. 이 지역 특유의 생물다양성은 이스터 섬의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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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가까이 이어진 서남쪽 투어를 마치고, 조금은 머리가 더 똑똑해진 기분으로 항가 로아로 돌아왔다. 어둑했던 구름이 점차 걷히고, 날씨가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숙소에서 휴대폰도 충전할 겸 잠시 쉬었다가, T를 포함해 숙소에 한가롭게 널부러져 있던 사람들을 다함께 선동해서(!) 아후 타하이 쪽으로 일몰을 보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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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했던 이날 오후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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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는 다르게 좋은 날씨 덕에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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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던 최고의 일몰 풍경. 일행 중 몇 명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마치 반드시 치러야 하는 종교적 의식처럼, 이 섬에 머무는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최고의 일몰 풍경을 보기 위해 하나둘 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저멀리 모아이들 사이로 천천히 사라지는 석양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날씨가 허락한다면, 매일 여기로 와서 해 지는 풍경을 봐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모여있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우연히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다. 그는 이 섬에 일주일가량 머물렀지만, 이날 처음으로 일몰을 보는 거라고 했다. 숙소 주인 역시 한동안 이스터 섬의 날씨가 좋지 않아 여행자들이 열흘 넘게 석양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말했었다. 보통 라파누이 일정을 3박 4일 정도 잡는 경우가 많은데, 운이 나쁘면 한번도 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일몰을 못보고 돌아가는 불운한 경우도 발생한다고.


여튼 내가 만났던 그는 내일 비행기를 타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간다며, 떠나기 전에 이 모아이와 함께 일몰 풍경을 보고 돌아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 행운의 순간을 함께 누리며 정말 행복한 저녁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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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감격스러운 날에 맛있는 것이 빠질 수 없지! 이곳에서 잡히는 신선한 참치로 만든 세비체 메뉴를 시켰다. 그러나 나갈 때는 길가의 거대 바퀴벌레 떼를 보며 기겁하며 돌아왔다




다음 날의 일정은 이스터 섬의 하이라이트라 불리는 동쪽 투어를 나가는 날이었다.

· 이 섬에서 가장 크고 거대했던 파로 모아이 Paro Moai 옆에 있는, '빛의 배꼽'이라는 뜻의 신성한 돌 테 피토 쿠라 Te Pito Kura

· 다양한 모아이가 함께 자리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아나케나 해변 Playa Anakena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잡지 표지로도 유명한, 라파누이의 대표적인 모아이 유적지 아후 통가리키 Ahu Tongariki

· 역시 마찬가지로 냇지오 잡지 표지로 본 적 있는, 모아이 작업장 라노 라라쿠 Rano Raraku


이번에는 T 뿐만 아니라, 전날 오전에 새롭게 숙소에 도착한 홍콩 친구 G도 함께 투어에 나섰다. 6개월 일정으로 중남미를 여행 중이라는 G는 간만에 T와 광둥어로 떠들 수 있어서 그런지 매우 신이 나있었다. 홍콩 영화를 듣는 듯한 그들의 수다를 배경음 삼아 동쪽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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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특산물인 파인애플과, 아나케나 해변쪽으로 가는 길에 들린 테 피토 쿠라. 이 돌은 마나 Mana 라고 불리는 초자연적 에너지와 치유력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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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케나 해변 근처에 떡하니 자리한 모아이들. 붉은 모자 Pukao 를 쓴 모아이와 모자 없는 모아이가 있는데,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모자는 후대에 추가된 장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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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가 가장 고대해 왔던 아후 통가리키 유적지. 바다를 등지고 일렬로 선 15개의 모아이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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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T와 G와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고, 꺅꺅대며 한참을 즐겁게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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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모아이 공장'이라 불리는 라노 라라쿠. 모아이들을 어떻게 만들고 운반했는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스터리로 가득찬 신비의 섬, 라파누이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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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 같았던 라노 라라쿠의 풍경. 여기서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큰소리로 떠들며 펜스를 넘으려다 제지를 받았는데, 오히려 친구들이 더 창피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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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노 라라쿠 위에서 내려다 본 아나케나 해변과 통가리키 모아이들의 인상적인 조화. 밝고 투명한 남태평양의 색감과 참 잘 어울렸다.


이날 투어에서 만난 중국계 독일인 친구 C.

나의 홍콩 출신 친구들과 중국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마침 다음 날부터는 별다른 투어가 없는 크리스마스 연휴이기도 해서, 우리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넷이서 의기투합해 렌트카를 하나 빌리기로 했다. 유럽에 사는 C와 캐나다에 사는 T는 기어가 수동인 차를 몰 수 있었고, 나는 스페인어 통역을 맡아 열심히 렌트카 가격을 깎았으며, G는 내 옆에서 열렬히 응원을 해주었다.


협상 끝에 괜찮은 가격으로 렌트에 성공했고, 하루 동안 빌리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새벽 그 유명한 통가리키 모아이의 일출을 보러가기로 했다.

가이드가 없이 새벽녘에 입장을 시도하는 모험. 우리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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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어김없이 일몰을 보러 출동! T와 G, 그리고 새로 합류한 C까지 모두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모아이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장면을 보았다.




이날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3시부터 출발을 감행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숙소 주인 왈, 코로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스터 섬에서는 보통 처음 입도한 날 구매하는 통합 입장권만 있으면 정해진 기간 동안 주요 유적지를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 관광으로 먹고 사는 이스터 섬의 경제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일까? 코로나 이후로는 이 섬을 관광하는 데 있어 점점 다양한 규칙과 제한이 생기기 시작했다. 칠레 당국에서는 문화유산 보호와 무분별한 출입 방지, 그리고 현지 가이드 고용 창출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지금은 통합 입장권이 있어도, 통가리키 같은 주요 유적지에는 동행하는 가이드가 없으면 입장 자체가 허용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모든 관광객은 반드시 여행사 투어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유적지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과 원성 또한 자자한데, 여행의 자유도가 크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이스터 섬은 그만큼 고립된 곳이라 물가가 비싸기로도 유명하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단순히 통가리키 입장을 위해, 동행 명목으로만 존재하는 새벽 일출 투어 가이드에게 또다시 인당 100달러가 훌쩍 넘는 돈을 쓰고 싶진 않았다.


사실 투어가 진행되는 낮 시간에 이미 유적지 관련 설명을 충분히 다 듣기 때문에, 새벽 일출 투어의 가이드는 그저 '걸어다니는 출입증'일 뿐 투어에서 실제 역할은 미미하다. 나는 이 모든 구조가 거대 관광 여행사 세력과 결탁한 칠레 정부의 농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뼛속까지 라파누이인인 우리 숙소 주인조차도 나의 생각과 비슷했는지 불만 섞인 목소리를 늘어놓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새벽 계획을 들은 그는, 이 계획이 무사히 성공하기를 빌어주었다.



새벽 네 시도 되기 전에 도착한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미리 온 사람들이었다. 그중 모른 척 입구를 지나가려다 실패한 사람들은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고, 담을 넘으려다 경비에게 걸린 사람도 있었다. 입구하고 거리가 멀어서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한 벽 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틈을 타서 넘어오는 사람도 한두명쯤 보였다.


우리가 생각한 계획은 - 조금 일찍 주차장에 와서 기다리다가, 이윽고 큰 버스 몇 대로 들어오는 단체 관람객들 뒤에 모른 척 따라 붙는 것이었다. 이건 새벽이라 앞뒤 사람 얼굴조차 잘 안 보이고, 동행 가이드 역시 밤중에 모든 손님의 얼굴을 기억하기는 어려우니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작전대로 시치미를 뚝 떼고, 앞서 가는 단체 관광객 팀의 일행인 척 입구로 들어섰다. 매표소 창구 직원과 스페인어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아, 제 뒤에 있는 애들은 내 친구들인데 저 따라 들어올 거에요."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T와 G가 스페인어를 듣고 갑자기 당황했는지, 내가 아까 줄 서기 전에 당부했던 "무조건 날 따라 들어오라"는 말을 까먹었다는 듯 몸이 굳은 채 멀뚱멀뚱 서 있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못 들어갈 판이었다. 그때 뒤따라 오던 C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버스에 카메라를 놓고 와서 제가 늦었고, 내 친구 한 명은 이미 앞에 들어갔어요. 이 친구들은 저를 기다리던 거고요."


C의 재치있는 답변으로 상황은 정리되었고 위기를 넘겼다. 결국 우리 넷 모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작전 성공! 그렇게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트기전 가장 어두운 새벽의 통가리키 속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이 사건은 T가 이후 스페인어 공부에 열을 올리게 된 결정적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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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그 생고생을 해서라도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던 통가리키의 일출



또 하나의 길이길이 남을 여행 에피소드를 남기고,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점심 즈음부터 입장권 검사가 없이 렌트카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들을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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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라노 카우와 주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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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누이의 최고봉 테레바카 Terevaka 화산 하이킹.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서 우리는 남의 집 농장으로 갈 뻔 했다. 길 자체는 완만한 편이며 초심자도 천천히 올라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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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 있던 모아이와 위에서 내려다 보는 항가로아 쪽 풍경. 정말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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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같은 아나케나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며 보낸 느긋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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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딩 친구가 모래로 만든 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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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니까 성당도 갔다. 천주교와 라파누이 문화가 섞인 특이한 양식의 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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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상, 십자고상, 성모상 등이 모두 라파누이풍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이날은 크리스마스! 전날 숙소 주인이 투숙객 모두에게 혹시 크리스마스 저녁 만찬에 참여할 거냐고 물었었다. 우리 모두는 흔쾌히 동의했고 식사 재료비를 위해 약간의 비용을 지불한 다음, 함께 숙소 주인 가족의 저녁 준비를 도왔다. 씩씩하고 멋진 중년의 언니들은 야채를 썰고, 아저씨들은 바베큐 판에 불피우기 등 밑준비를 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드디어 라파누이풍의 크리스마스 저녁식사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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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음식이 오가던 저녁식사, 그리고 이스터 섬에 머무는 동안 정말 삼촌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 지냈던 우리의 라파누이 주인장


그날 저녁 아주 많은 와인과 이야기들이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던 나를 제외하면, 모두들 다른 대륙에서 온 여행자들이었고 그중 절반 이상은 중남미를 몇 달 이상 장기여행 중이었다. 이미 중미를 다녀온 이들에게서는 생생한 여행 소식과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었고, 각자가 경험한 여행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 세계 곳곳에서 모인, 배경도 나이도 전부 다채로운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가 이 머나먼 이스터 섬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 시간이나 경비를 고려하면 분명 쉽지 않은 선택인 건 사실이지만 -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까지 오길 정말 잘했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밤. 그날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아주 소중한 여행의 한 장면이었다.





왁자지껄하면서도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다음 날, 나와 G는 이날 각각 오전과 오후 비행기로 떠나는 C와 T를 배웅하고 마을 주변을 천천히 걷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고 마을 지리가 익숙해지자, 마타베리 공항은 걸어서도 갈만한 거리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미 렌트카도 반납했겠다, 보고 싶은 곳들도 다 봤겠다, 우린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G와 함께 항가 로아 주변을 여유롭게 돌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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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변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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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아래 색색깔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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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크고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이스터 섬이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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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거북을 보호하자는 경고 문구. 실제로 바다거북들이 마을 근처의 해안으로 오는 일이 흔하다. 나 역시 장비를 빌려준 친절한 사람 덕에 거북이들, 예쁜 물고기들과 같이 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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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문양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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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줄이기 위해 산티아고에서 조달해 온 한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 해치웠다. 이스터섬은 물가가 비싸므로, 이렇게 요리해서 끼니를 해결하는게 지갑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스터 섬을 떠나기 전날 밤, 경제적인 이유로 계속 고민하고 망설이던 별 투어 Stargazing Tour 에 결국 참여하기로 했다. '그래, 언제 여기까지 또 와 보겠나' 싶은 마음에 냅다 지른 선택이었다. 소수만 참여하는데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인기 투어이며, 내가 문의했을 때 다행히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투어가 시작되고 가이드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보니 뉴질랜드로 유학 왔던 라파누이 여인과 사랑에 빠져 이 섬으로 오게 되었고, 그렇게 그녀와 가정을 꾸리게 된 뉴질랜드 남자가 운영하는 투어였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라파누이에서의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으로 가득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의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빛 하나 없이 캄캄한 남태평양 밤하늘 아래 라파누이 신화를 곁들인 남반구의 별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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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투어는 주로 아나케나 해변 주변의 언덕 근처에서 이루어진다.
_DSC8034-Enhanced-NR.jpg 이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셀 수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들과 모아이. 별 투어의 특성상 늦은 새벽에 마치지만, 멋진 이야기와 사진과 함께 돌아올 수 있어 행복한 투어였다.



별들이 뜨고 지는 섬 하늘을 바라보며, 왜 뉴질랜드인이 여기에 머무르기로 결심했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딴 곳의 밤하늘 아래서 아주 오랫동안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이스터 섬에서의 마지막 날, 이곳을 떠난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눈이 유난히 일찍 떠졌다.


아침에 숙소에서 같이 머물던 대만계 미국인 왕언니와 자전거를 타고 항가 로아 주변부를 쭉 돌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자전거로 60km씩 돌기도 한다는 체력 좋은 자전거의 여왕인 언니에 비해, 산악형 자전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시작부터 영 비실거렸다. 게다가 남태평양의 외딴 섬이라는 특성상 도로 정비나 공사가 쉽지 않아서인지 어찌나 길이 깨진 곳이 많던지! 자전거가 덜컹거릴 때마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마을과 바다 풍경을 눈에 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오후에 같은 비행 일정이던 G와 함께 공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쇼핑을 가기로 했다. 내 평생의 기억으로 남을 만큼 너무나 좋았던 이 섬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게 장식용 모아이들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때를 위해 그동안 아껴 두었던 비상금의 일부를 슬쩍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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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도 아르테사날 Mercado Artesanal 은 스페인어로 수공예품을 파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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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들이 이곳에서 자라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광을 낸 모아이를 구입했다. 이곳 주민들에게 성스러운 나무로 여겨지는 미로 타히티로 만들어서 비쌌지만, 고민끝에 흔쾌히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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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변 선물용으로 돌로 만든 작은 모아이들을 구입했다.



우리가 배워온 라파누이의 역사는 피로 쓰여진 치욕의 역사였다. 섬에 나무와 자원이 부족해 결국 모아이 짓기를 포기했고, 심지어는 만든 이들이 있던 모아이마저 쓰러트렸다는 이야기. 식량이 모자라 식인까지 벌어졌으며, 유럽인들이 당도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황폐화되어 있었다는 서사는 오랫동안 상식처럼 통용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라파누이는 전혀 달랐다. 이토록 극도로 외딴 섬에서도, 긴 시간 동안 풍부한 역사와 신화, 문화를 창조하고 품어온 사람들에게 과연 '폐허'라는 말이 어울릴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스터 섬의 역사와 관련된 연구에서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자원이 극도로 제한된 섬에서 경쟁하듯 모아이를 세우다 결국 환경 파괴로 인해 인류 문명이 붕괴되었다는 가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스터 섬에는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고, 당시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충분히 부양 가능한 양이었다." 라는 기존의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여전히 정확한 진실은 단정하기 어려우나 만약 이러한 연구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 남태평양의 외딴 섬은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반대로 '이 외딴 섬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긴 시간 동안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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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기어코 사먹은 이 지역 특산 파인애플. 산티아고에 짊어지고 가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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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5시간이 넘는 비행을 통해 산티아고로 돌아가기 전. "요라나"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Iorana 는 라파누이어 인사이다.



따뜻한 기후로 인해 언제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천혜의 자연을 지닌 이스터 섬.

그리고 그 넉넉한 자연을 품고 독특한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 온 친절하고도 강인한 라파누이 사람들.

라파누이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만들어 준 숙소 주인 가족들과 전 세계에서 온 다정한 여행자들.


G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여행에서 본 풍경만큼이나 함께한 사람로 인해 더 기억에 남아 그 여행지 자체를 더 오래, 깊이 기억하게 된다. 내게는 이스터 섬이 그런 여행지 중 하나였다. 내 평생의 기억에 남을 라파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아무 일정도 없이 그저 한 달 정도 쭉 살아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딴 곳의 크리스마스를 마음속에 조심스레 고이 접어 넣고 이 섬을 떠났다.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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