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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를 싫어하는 사회(마지막 회)

by 심상보

진짜를 싫어하는 사회다. 진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애써 외면한다. 진짜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쏟아부은 에너지의 결과는 사용하는 동안 서서히 겉으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대충'이라는 단어를 나는 좋아한다. 신경 쓰지 않고 수준 떨어지게 마무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대충'은 ‘대총(大總)’에서 온 말이다. ‘總’은 '총합'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한자로, 모든 경우를 더한 것이다. 건성건성 빈 곳이 많은 미완의 무엇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축약된 결과물이다. 엄청난 세월 동안 도자기를 만들어 온 장인이 어린 딸을 위해 툭! 만들어준 찻잔 같은! 그러니까 ‘대충’하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디자인은 대충 한다. 엄청나게 생각하고, 모든 가능성을 다 따져보고, 이것저것 샘플을 만들어 보고, 그리고 이런 형태가 가장 좋다고 정하게 된다. 대충! 그렇게 '진짜'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요즘은 진짜를 만들기 위해 생각할 시간에 레퍼런스(reference)를 찾는다. 말이 좋아 레퍼런스지, 그냥 베낄 것을 찾는 거다. 레퍼런스를 사용하려면 레퍼런스의 창작자와 비슷한 기량(skill)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스타일이 흔들리지 않고 작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레퍼런스를 찾고 도움을 받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공부(工夫)’다. 레퍼런스 창작자를 찾아,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배우는 것이다. 사실 공부는 중국 무술 '쿵후(功夫)'와 같은 단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같은 동작을 계속 연마해서 익숙하고 강해지는 훈련이다. 마치 무협지에서 고수를 찾아 수련하는 수련자들처럼 레퍼런스의 창작자의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의도와 기술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배우다가는 시간 다 가고, 때를 놓친다. 그래서 그냥 베낀다. 베끼는 시대! 그지 같다. 그래도 나는 진짜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건 세상이 두 쪽 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달고, 디자인에 가장 기초를 가르친다.

“디자인은 감정을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모든 소재는 중력에 영향을 받고, 걸침과 쌓임으로 몸에 머문다!”

내가 틀릴 수는 있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빈틈이 없는 이론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디자인을 하도록 얼르고 달랜다.

하지만 살아가는데 그다지 쓸모는 없는 지식이다. 제대로 이해한 학생들은 고통스러운 생을 살게 된다. 매트릭스의 빨간약처럼...... 주변에 디자인이 모두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하면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도 모르고 멍청하게 사는 것보다는, 알면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모든 패션 제품은 베낀 것이다. ‘모든’이라는 단어에 0.1%의 오류도 없다. 베낀 디자인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잘못을 전가할 필요도 없다. 필요에 의해서 제품은 탄생한다. 진짜는 필요 없고 익숙하고 싼 가짜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문화는 예전부터 서서히 이치를 따져가면 변해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와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에 변화와 풍요의 도구는 당연히 외부에서 가져왔거나 베낀 거다. 비스무리하게 만든 건 가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 그래서 만드는 사람들은 원형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비슷하게 만들면서 진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속고 싶어 한다.

요즘 한국의 문화상품들을 대하여 레퍼런스의 나라에서 ‘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좋아하는 것은 레퍼런스의 다른 해석에 대한 감정이다. 한국의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순간의 즐거움을 주는 한국 음악은 나름 가치가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순간적인 환호를 먹고사는 엔터테인먼트 종사자가 아니다. 오랜 시간 사용해 본 제품이 서서히 감동을 줄 때, 세계 곳곳의 소비자가 각자의 시간에서 디자이너에게 찬사를 보내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찬사를 듣기 어렵다.

빨간 약을 먹은 (일부는 끝내 거절하지만) 학생들은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된다. 진짜 디자인의 세계!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에 평생 좌절을 느끼며 디자인을 한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돈을 벌거나 누구의 찬사를 기대하지 않고, 머리가 깨지도록 자신의 디자인에 몰두하며, 순간순간 팝콘이 터지듯 머리에서 생각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직 5월이 채 지나지 않아 작품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촬영 일자를 정하고 포토그래퍼와 모델과 약속을 하고 나면, 마음은 이미 완성된 작품을 상상한다. 촬영까지 고작 2주! 그동안 대단한 변화를 만들기엔 부족하다. 완전히 새로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내가 몰아붙이지 않아도 학생들 스스로 다급하다. 그래서 해줄 것은 칭찬과 응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예전보다 의지와 마음이 약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시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칭찬과 위로를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 칭찬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적만 당하던 입장의 학생에게, 이 시점의 칭찬은 엄청난 에너지를 준다.

“많이 늘었네! 기대가 된다!”

이번 학기에도 너무나 고마운 나의 제자들!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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