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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Dec 01. 2020

최고의 죽음

아무리 생각해도 최고의 죽음은 역시 비행기 추락사가 아닐까 한다. 지금은 살날이 그저 짱짱하지만 나도 언젠가 죽는다. 만약 나의 죽는 방식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비행기 추락사로 죽었으면 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고통이 짧고 깔끔하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쇄약해진 육체에 병이 들어 쓴 약을 삼키다 죽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건 가혹한 일이다. 또 누군가가 병든 나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면, 그걸 감내하는 게 육체의 고통만큼 괴로울 것 같다.


그에 비해 비행기 추락사는 어떤가. 매우 깔끔하다. 죽음에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명쾌하기까지 하다. 삶이라는 내내 알쏭달쏭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하던 문장의 끝 자리에, 비행기를 머리부터 때려박으며 쿵! 아주 커다란 느낌표 하나를 찍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좀더 현실적인 것이다. 비행기 추락사고의 유족에겐 상당한 보상금이 나온다. 우리나라도 몬트리올 협약이라는 것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협약에 가입한 나라에선 항공기 사고로 승객이 죽거나 다치면 과실 여부에 관계 없이 항공사가 상당한 배상책임을 지도록 되어있다. 만일 사고 과정에 항공사 과실이 있다면 소송을 걸 수 있다. 그러면 보상액은 크게 늘어난다. 비행기가 추락하는데 항공사 과실이 없기는 힘들다. 97년 괌에 추락한 801편의 유족들은 미국과 대한항공에 승소해 1인당 20억 가량의 보상금을 받은 사례가 있다.


마지막 순간에 눈에 밟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남은 그이가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이 조금은 마음의 위안이 될 것 같다.



세 번째는 좀 도전적인 이유다. 죽기 직전, 거대한 쇳덩어리가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시간 동안 느낄 그 강렬한 감정이 궁금하다. 그건 극도의 공포일까? 정신이 나갈 정도의 혼란일까? 아니면 비로소 찾아온 체념일까.


어릴 때 삼거리 비탈길을 달려내려오다 오토바이에 치인 순간을 기억한다.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는데,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세세하게 보였다. 고통은 전혀 없었다. 그저 무언가 하얗다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좀더 크고 나서 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감지하면 알아서 차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아마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한다.


엄청난 속력으로 곤두박질 치는 쇳덩어리 안에서도 뇌는 그런 일을 할까? 살만큼 다 살았다면 최후의 순간엔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몇 살쯤 됐을까. 머리는 하얗겠지. 어딘가의 휴양지로 떠나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혹은 돌아오는 길도 나쁘지 않겠다.


오렌지주스를 마시다 무릎에 덮은 담요가 포근해 스르르 잠이 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무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젊은 여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저 멀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얼핏 보인다. 그때 누군가의 아이가 오래 참아온 울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문득 알아챈다.

아... 오늘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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