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제법 차다.
이렇게 겨울이 다가오면 강남 한복판에서 덜덜 떨며 호떡장사를 하던 때 생각이 난다.
대학생이었고, 방학이었다.
어치피 알바를 할 거면 무언가 재밌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서빙이나 카운터 같은 그런 뻔한 거 말고. 이때 아니면 평생 언제 해보겠나 싶은 그런 일을 원했다.
당시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같은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막 어떻게 끓는 피를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때였다.
그 시절의 난 노동, 고난, 상처, 역경을 원했다.
호떡장사는 알바몬에서 찾은 모든 일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일이었다.
① 충분히 늦잠 자고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출근시간이 늦고 ② 다른 알바보다 시급이 세며 ③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경험이고 ④ 무엇보다 충분히 고생스러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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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동 차병원사거리 횡단보도 앞이었다.
뒤편 심부름센터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심부름센터에서 일하는 안경 쓰고 면도 대충하는 형이 알바생 담당이었다.
출근 첫날 형이 다른 두 명의 알바, 군고구마 군밤을 인사시켜주었다. 그들에게 나는 호떡이었다.
장사는 잘 됐다. 일단 자리가 좋았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달큼한 군고구마 냄새에 고개를 돌렸고 그중 몇몇이 손님이 되었다.
장사가 되면 하룻밤에 군고구마만 150만 원어치가 팔리기도 했다.
알바를 셋이나 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의 무슨 중소기업이었다.
거기서 개고생을 하면서 호떡을 구웠다.
그 해는 너무너무 추웠다. 뉴스에선 '지난 십수 년간 올해가 가장 춥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또 설레발을 쳤다.
볼이 썰릴 것 같은 칼바람이 찢어진 천막 구멍으로 몰려들어와 반대쪽 구멍으로 나갔다. 천막은 적절히 잘 찢어지고 벌어져서 바람의 훌륭한 하이패스 통행로가 되어주었다.
그 관통의 가운데 내가 있었다.
작은 포장마차 안엔 손난로 하나 없었다. 호떡기름의 온기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판에 기름을 자작하게 깔고 호떡을 앞 뒤로 굴리다보면 설탕을 먹은 가운데가 둥글게 부푼다. 못난이 호떡이라는 것이었다.
형은 첫날 시범을 한번 보여주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열악하고 조악한 근무환경에 그냥 그렇게 방치해놓고 가끔 와서 아직 도망가지 않았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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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해서 차병원사거리 지박령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인 저녁들이 이어졌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돌아갈 때면 온몸에서 기름쩐내가 났다. 세탁을 해도 잘 빠지지 않는 특유의 역한 냄새와 얼룩이 가득했다.
손이며 옷이며 얼굴이며 머리에서 기름이 반들반들했다.
자리가 있어도 나는 앉지 않았다.
사람 없는 구석에 지친 몸을 기대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지하철은 너무 따뜻해서 졸음이 몰려왔다. 나른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역삼과 선릉을 지나 잠실로 향하는 2호선엔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비싸고 고급진 옷들이었다.
괜히 위축되고 눈치가 보였다. 한껏 꾸며 입은 예쁜 여자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자꾸만 구석으로 숨게 됐다.
그러나 위축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더는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 그 구석자리가 편안했다. 막차에 기대 기름쩐내 풍기는 내가 뿌듯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본 스스로의 모습이 건강하게 잘 자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 같았달까.
저 부자들은 평생 못해볼 노동경험을 하고 기름쩐내 풍기면서 돌아가는 내 하루가 그들의 안락한 하루를 이긴 느낌이었다. 마치 파리에서 노숙자 행세를 하는 젊은 조지 오웰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거였다. 개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
혹시 언젠가 지하철 막차 구석에서 기름쩐내 풍기며 씨익 웃는 사람을 봤다면 그건 나였으리라.
그때 기름냄새 풍기는 남루한 행색의 노동자로서, 나는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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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 솔직히 잘 굽지 못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위생도 형편없었다. 아니... 위생이랄 것도 없는 환경이었다. 손님 없을 때 청소를 하며 여기서 청소라는 것을 시도한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자연히 알 수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자꾸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 사람들은 나를 짠하게 느꼈던 것 같다.
"이거 먹고 어제 배탈이 났다"면서 또 두 개를 먹고 가는 아저씨. 호떡 하나 사면서 한라봉 세 개 주고 가는 누나.
그런 분들이 자꾸 와서 팔아줬다.
낮엔 군고구마 군밤 없이 나 혼자 호떡만 팔았으니까, 사정을 모르는 역삼동 사람들 눈엔 내가 뭔가 사연있고 열심히 사는 젊은친구로 보였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군밤도 나와 같은 노동덕후였다.
당시 나는 학보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는데, 손님 없을 때 잡담을 나누다가 신문 만드는 얘기를 하게 됐다.
그때부터 군밤이 날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가 두 살인가 더 많았는데 갑자기 형, 형 하면서 나를 상당한 친근감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라는 프랑스 진보 신문 몇 부를 가져와 자기가 보는 신문이라며, 나도 읽어보면 좋아할 것 같아 가져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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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고생스럽고 그래서 흡족한 한 달 반이 지났고 알바는 종료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돈을 안 줬다. '다음 주에 준다'와 '내일 준다'의 반복이었다. 이러다 곧 개강이었다.
가만 보니 개강해서 신경을 못쓰게 될 때까지 버티다 떼먹으려는 수작이었다.
개강을 일주일 앞둔 오후에 차병원사거리로 찾아갔다.
내 돈 달라고 하자 심부름센터 형과 사장(빅 사장은 아닌 것 같고 스몰 사장 정도 느낌의)이 나와서 욕을 하며 윽박질렀다.
처음엔 겁이 나서 그냥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고 열받아서 지하철로 가다 말고 돌아섰다.
일단 경찰에 전화부터 했다. 여차저차 호떡을 팔았다, 아니 나는 알바였다, 근데 돈을 안 준다, 아주 잣같은 놈들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경찰은 "4대보험 들었냐"고 묻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자 "그런 일엔 출동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부름센터에 드러눕기로 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내 돈 달라고, 왜 돈 안 주냐고 소리쳤다.
콜센터 여직원들이 나를 쳐다보자 "다들 돈 받고 일하시죠? 저는 돈을 아직도 못 받았으니 조심하세요"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깔깔 웃으면서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스몰 사장이 부리나케 달려와서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며 내 멱살을 잡고 문 밖으로 내쳤다.
바로 이게 내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다시 경찰에 전화했다.
"맞았다. CCTV에 다 찍혔다. 이건 폭행사건"이라고 말했다. 그 즉시 "지금 가겠다"고 경찰이 말했다.
경찰은 그래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이렌을 켜고 극적으로 등장해주었다.
경찰이 오자 족제비 같이 생긴 스몰 사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뛰어서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다.
그 와중에도 나를 돌아보며 뭐라뭐라 쌍욕을 엄청 해댔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매우 신속하게 하는 모습이 그 와중에도 좀 감탄스러웠다.
경찰이 들어오자마자 면도 대충 하는 형은 나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삑삑 금고를 열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현금을 꺼내 정산해줬다.
아 역시 돈 있었네 이 잣같은 놈들!
형은 돈을 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눈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 그렇게 살지 마세요." 경찰 옆에 서서 나는 쿨하게 사과를 받아줬다.
경찰이 역삼역까지 태워주었다. 내가 아직도 분이 안 풀려서 씩씩대자 앞 좌석의 나이든 경찰이 말했다.
"돈 떼먹는 놈이 제일 나쁜 놈이야."
며칠 후 군밤에게 전화가 왔다.
"형, 돈 받으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어떻게 받으셨어요? 저도 지금 못 받고 있거든요."
나는 군밤에게 'CCTV에 찍히는 게 포인트'라고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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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참 고생스러웠다.
그야말로 딱 내가 원하던 밑바닥 경험이었다.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