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사무실에 가보니 입구에 이코쟁이 있었다. 또 저 스티커다. 대체 저놈의 이코쟁은 정체가 뭘까. 어떤 단체일까? 아니면 무슨 반미 활동의 일환일까?
확실한 건 이코쟁은 마포구의 그 누구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장담한다. 홍대 합정 성수 성산 서교 연남 연희 망원 그 어느 곳을 간데도 그곳은 이코쟁이 이미 다녀간 곳이다.
이코쟁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거기가 마포구 어디가 됐든 신호등 어딘가에 이코쟁 스티커가 붙어있을 것이다. 혹은 뒤돌아서 담벼락을 보면 거기 숫자 2와 코가 연결된 그라피티가 있을 것이다. 만약 오늘 하루를 홍대에서 보낼 예정이라면 당신은 곧 수많은 이코쟁과 맞닥뜨리게 된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길거리나 놀이터, 쓰레기통, 아이스크림 박스, 횟집 수족관, 변전함, 전봇대, 에어컨 실외기, 화분, 심지어 변기에서도.
출근길에 신호를 기다리는 트럭 뒤편에서 이코쟁 그라피티를 또 발견한 날, 저 이코쟁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메모장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이코쟁은 누구인가?'
마침내 연휴가 찾아왔고, 집요한 검색 끝에 이코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 이코쟁을 소개한다.
서프라이즈! 이코쟁은 사람이었다. 스케이터다. 본명은 잭 부드(Jack David Bood), 잘생긴 호주 청년이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머리는 금발이다. 코는 물론 크다. 몸무게는 61 혹은 62kg, 신발 사이즈는 270cm, 엉덩이둘레는 96이다. 이코쟁의 엉덩이 정보까지 알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모델 일도 하기 때문이다. 마크곤잘레스 같은 스트릿 브랜드에게 이코쟁은 매력적인 모델일 수밖에 없다.
이코쟁이 서양사람이어서 나는 안도했다. 실은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반미운동가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 익살 안에 인종차별적 비하가 없기에 이코쟁의 익살스러움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사실 전에도 이런 오해를 한 적이 있다. 홍대 어딘가의 카페에서 반미 샌드위치를 파는 걸 보고 엉뚱하게도 반미가 '그 반미'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자유와 저항의 거리라고 너무 그쪽으로만 생각하나.
이코쟁은 언제부터 활동했을까. 일단 인스타에 #이코쟁 태그를 달고 올라온 최초의 글은 2018년 6월이다. 그때 벌써 "홍대 여기저기 잔뜩 붙어있다"며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하고 묻고 있었다.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코쟁의 정체를 물었다. 네이버 지식인에도, 외국인 사이트에도 이코쟁을 아느냐고 묻는 글이 올라왔다. 한국인 외국인도 대체 저놈의 스티커는 정체가 뭔지 궁금해했다.
알고보니 이렇게 길거리에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는 그라피티의 일종이었다. 벽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것과 같은, 어떤 저항의 메시지 혹은 그냥 재미로 하는 행위다. 그런데 이코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게 꽤나 짭짤한 마케팅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브랜드 인지도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홍대에 붙어있는 스티커들을 유형별로 나누면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개인
ex. 이코쟁(or 2코쟁) = 스케이터
ex. BNE(or BNE WAS HERE) = 익명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뉴욕 출신.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지구 곳곳에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
2. 단체
ex. dtsq(델타시퀀스), 빌리카터, 페이션츠 = 홍대 인디씬의 뮤지션
3. 브랜드
ex. 눙눙이, 4EED, CONART = 홍대 스트릿 피플이 타겟인 브랜드
이코쟁은 스케이트보드, 바이크, 타투 같은 스트릿 컬처에 푹빠져 그 자신이 스트릿 컬처가 된 사람이다. 또 한국을, 서울을 무척 좋아한다. 보그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연히 여행 왔다가 서울이 아주 마음에 들어 관광비자 3개월을 꽉 채워 늘 놀러 오곤 했어요. 지금은 패션 브랜드 미스치프 매장 스태프 겸 프리랜스 패션모델로 일하고 있어요. 한가할 때는 동대문, 뚝섬 등 서울 곳곳에서 스케이트보드를 즐깁니다. 좋아하는 식당도 한 달 뒤에 가보면 없어지고 모든 게 빠르게 바뀌는 서울이지만, 저는 그 변화가 좋습니다."
스케이트도 잘 타고 유머감각이 있는 잘생긴 청년 이코쟁. 그를 응원한다. 올해는 원하던 장기체류비자를 꼭 받을 수 있게 되길. 그리고 더 많은 곳에 이코쟁 스티커를 붙여주기를.
그래도 아저씨들 트럭에는 그라피티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