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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Jan 16. 2021

0, 1, 2, 34

이따금 적어놓고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기억나지 않는 메모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건 도저히 감도 안 온다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0, 1, 2, 34"


메모를 처음 발견했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이런 걸 적어놨던가. 언제? 왜? 아무 기억도 단서도 없었다. 메모장 스크롤을 내릴 때면 늘 여기서 멈칫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그랬다. 언제? 왜? 내가?

팔짱을 끼고 기억을 되짚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메모를 남겨놓은 걸까.



0.


일단 생각을 초기화하자.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자.

단서는 무엇인가.


단서 1. 특징

1. 숫자는 5개이며, 연속성을 띤다.

2. 1이 아니라 0부터 시작한다.

3. 3과 4 사이를 의도적으로 붙여놓았다.


단서 2. 작성 환경

1. 아이폰메모에 적혀있고, 메모장의 제목은 '에세이 비슷한 것'이다.

2. 메모장의 전체 스크롤이 100이라고 봤을 때 약 30 정도, 그러니까 위쪽과 중간 사이에 있다.

3. 해당 메모 위와 아래에 적혀있는 다른 메모는 다음과 같다.

-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 비겁해지지 말자. 너그러운 사람. (위)

- 비둘기는 대체 뭘 먹는 걸까 (아래)


단서 3. 유사 행위

오래전에 숫자에 관한 시 비슷한 걸 쓴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2, 3.

2는 균형의 숫자다. 빛과 그림자. 해와 달. 선과 악.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여자와 남자.

3은 조화다. 2+1이다. 고심의 흔적이다.

철수 영희 바둑이. 엄마와 아빠와 나. 커피와 담배와 대화. 빨간불 파란불 그리고 노란불. 입구와 출구와 비상구.

4, 5.

4는 틀이다. 근본의 생김새다. 생각의 틀이다. 세상의 구조다.

사각의 링이다. 액자다. 동서남북이고 상하좌우다. 남녀노소다. 책이다. 박스다. 검색창이다. 네 발과 두팔두다리다. 네모난 돈으로 산 네모난 건물의 네모난 방이다.

5는 처음 생긴 여유다. 멋이다.

안경의 날렵함이다. 치타의 섹시함이다. 별의 가운데다. 2도 3도 4도 아니다. 스스로 뭉개짐이다. 사과의 자연스러움이다.

6, 7.

6은 틀 속의 균형이다.

사각 안에서 미끄러지는 창문 한 쌍이다. 냉장고의 나중과 지금을 책임지는 문이다. 박스의 열림이다. 거울을 보는 나와 나를 보는 거울이다.

-

0, 1

0은 동그랗게 웅크린 시간이다. 동그란 것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는다.

1은 시작이다. 달리기를 하려는 사람의 준비자세다.



1.


제일 먼저 유추해볼 수 있는 건 예전에 써둔 저 시 비슷한 무언가를 모티브로 어떤 에세이를 써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에세이 비슷한 것'에 들어있는 메모이며, 시 비슷한 것과 메모는 질감이 닮았다. 꽤 설득력 있는 단서의 조합이다.

저 시 비슷한 애매한 무언가를 발전시켜 글 한 편으로 완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래서 메모를 남겨놨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내가? 물론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왜 0부터 시작하느냐, 또 왜 4에서 끝나느냐 하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가장 모르겠는 지점은 '34'다. 대체 왜 저 두 숫자를 붙여놓았는가. 여기가 해결되지 않는다.


2.


다시, 생각하자. 다른 단서는 어떤가.

메모가 비교적 최근에 적혔다는 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러 메모앱을 쓰다가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 순서가 뒤죽박죽 되었기 때문이다.

메모 위아래에 적혀있는 다른 메모도 '책임을 회피하지 말자'와 '비둘기'에 관한 것이라 맥락을 형성하지 못한다. 아니 근데 비둘기는 대체 뭘 먹는 걸까.


역시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단서는 1번이다. 1번으로 돌아가자.


34.


시 비슷한 걸 재료로 나는 어떤 글을 쓰고자 했는가. 0, 1, 2, 34. 그 글은 왜 0부터 시작하며, 왜 4에서 끝나는가. 마지막 3과 4는 왜 붙어있는가.


0, 1, 2, 34. 34? 어쩌면 가속이 아닐까? 회전하는 바퀴처럼 0, 1, 2를 거치며 두 바퀴를 돌고 나자 3과 4의 지점에선 속력이 붙은 게 아닐까. 그럴 수 있다.


시 비슷한 것을 다시 본다. 아뿔싸 3과 4는 떨어져있다. 23-45-67 그리고 01의 구조로 쓰여있다. 속도에 관한 내용도 없다. 음 아닌가.


0, 1, 2, 34. 5,6,7은 왜 버렸을까. 3과 4의 연속 뒤에 종결되는 에세이란 무엇이었을까.


0, 1. 왜 0부터 시작하고자 했는가. 1이 아니라 0부터 시작하고자 했던 데는 분명히 의도가 있다. 그게 뭐였을까.


어쩌면 내가 잘못짚은 걸 수도 있다.

처음부터 저 시 비슷한 것과 메모는 연관성이 없는 게 아닐까? 0, 1, 2, 34. 이건 2,3으로 시작해 4,5,6,7을 거쳐 0,1로 회귀하는 이상한 시 비슷한 것과 무관한 것일 수 있다.


아니 잠깐만, 뭐야 시 비슷한 것에서 7은 내용이 없네? 헉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았지. 사람을 열받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아니다 일단 7의 내용 없음은 놔두자. 메모에 집중하자.


다시, 일단 생각을 초기화하자.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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