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2 리마스터드가 나온다고 한다. 출시예정일은 연말인데 벌써부터 사람들이 몇 달 정도 자기 인생에서 잉여시간을 만들고자 마음먹고 있다.
"와...... 백파더 접어야겠네...." 디아블로 유튜브 공식 트레일러에 백종원이 댓글을 남겼다.
"와..... 마술 접어야겠네......" 최현우가 받았다.
이어 7,628명의 무언가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그 열심이던 무언가를 접어야겠다는 댓글 릴레이를 펼쳤다.
디아블로2, 정말 무서운 게임이다. 당시 인생 접힐 뻔한 수험생이 한둘이 아니다.
나도 디아블로2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디아블로2가 나왔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내가 원해서 중학생이 된 건 아니었고 사회가 나에게 정해진 수순에 따라 이제 슬슬 중학생으로 살아보면 어떻겠니 하고 슬쩍 넘겨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은 되었으나 나는 중학생이 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1998년과 2001년 사이. 또 사회가 다시 스리슬쩍 고등학생을 시킨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내 보금자리는 피씨방이었다. 거기가 나의 학교였고, 직장이었고, 놀이터였으며, 쉘터였다.
피씨방은 단순히 게임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나의 커뮤니티였다. 루소 형제가 만든 미드 <커뮤니티>를 봤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드라마 속 그린데일이란 아무 희망도 미래도 없는 좆좆소 전문대학 같은, 그야말로 좆좆소 전문PC방 같은 거였다. 그 안에서 돈을 쓰고 돈을 벌고 친구를 사귀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예절을 배우고 연애를 했다.
모두 다 무언가 하나 이상의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직장이 없거나, 삶에 대한 의욕이 없거나, 부모가 없거나 뭐 그런. 피씨방은 세상으로부터 방치된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다 같이 삶을 유예하는 공간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그냥 좀 살다가 적당한 시점이 오면 죽으려 했고, 당시의 나에겐 그게 너무나 자연스런 수순이라 삶에 대한 아무 의구심도 들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 계획? 꿈? 그런 건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다.
밤낮으로 게임을 했다. 학교는 가는 날과 안 가는 날의 비율이 비슷했다. 출석일수는 애초에 모자랐지만 자기 반에서 퇴학생이 나오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던 담임들이 서류를 조작해 매번 다음 학년으로 나를 밀어올렸다.
중학생이 중학생으로 사는 일에 관심이 없으면 담임이 알아서 중학생으로 만들어준다. 서클을 정해야하는 날엔 붓펜글씨부 같이 정원이 절대 차는 일 없는 곳에 넣어준다. 문과와 이과 중에 골라야 하는 날엔 이과에 넣고 학급의 이과진학률을 높여 자신의 인사평가에 유리한 점수를 챙기는 식이다.
교복을 입고 나는 PC방으로 갔다. 자주 가다보니 내 자리도 정해지고, 친구도 사귀고, 뭔가 좀 배우기도 하고. 뭐 학교나 진배없었다.
그런 생활이 가능했던 건 디아블로2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씨방비가 있어야 게임을 하니까. 아이템 복사로 돈을 벌었다. 당시 게임들의 서버 인프라 수준이란 지금에 비하면 조잡한 것이었고 동시접속자가 몰리면 끈적끈적한 렉이 생겼다. 그 시차로 인해 아이템이 복사되는 경로가 생겨났다.
거래의 단위는 '조던'과 '인벤'이었다. 아이템 중에 모든 스텟을 올려주는 반지가 있는데, 그 반지 이름이 Ring of Jordan이어서 조던링, 조던이라 불렸다(사실은 요르단이지만 알게 뭔가). 그 아이템이 당시 디아블로2의 화폐 역할을 했다. 마치 '1컨테이너' 처럼 조던을 한 계정 인벤토리에 가득 채운 상태를 '한 인벤'이라는 단위로 취급했다. 인벤 당 몇십만원의 시가로 거래가 됐다.
처음엔 우연이었다. 어 이거 뭐야 칼 두 개 됐어. 누군가 말하자 금방 사람들이 빙 둘러섰고 어디어디 나도 좀 보자 어떻게 했어 다시 한번 해볼까 하는 사이 렉이 심할 때 일련의 동작을 하면 아이템이 복사된다는 걸 알게 됐다.
게임사이트 게시판에 판매 글을 올리자 오분 만에 구매자가 나타났다.
돈이 된다는 걸 알자 피씨방의 모든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복사에 매진했다. 업데이트로 복사가 막히면 새로운 방법을 연구했다. 피씨방 사람들은 일종의 스터디를 만들어 이런저런 방법을 실험하고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성공법을 공유했다. 서버가 안정적인 상태라 복사가 힘들 땐 유럽 서버를 이용하면 된다는 사실도, 아이템 떨어뜨리는 타이밍에 맞춰 랜선을 뺐다 끼는 하드웨어적 방법도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알아냈다.
돈을 많이 벌면 그 사람이 그날 밥을 샀다. 피씨방 구석 테이블에 팔보채, 족발 같은 음식을 쌓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자연스레 한솥밥을 먹었다. 유사 식구(食口)가 된 셈이었다.
나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단 그냥 그 생활이 계속 하고 싶었다. 애초에 돈에 관한 개념도 없던 때라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 줄 몰랐다. 그때 어울리던 형은 만원짜리로 똥을 닦거나 옥상에서 비행기를 접어 날리기도 했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하면서 낄낄대고 놀았다. 돈이야 뭐 복사하면 되니까.
게임은, 그중에서도 디아블로2는 정말 재밌었다. 현실의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애들한테 아이템과 레벨은 엄청난 성취감을 줬다. 레어며 유니크며 그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 스텟을 올려주는 반지를 끼면 현실의 내 스텟이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풀셋을 맞추고 다른 접속자보다 우월해지면 승리감을 느꼈다. 마을 NPC들은 내가 접속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모두 줄을 서서 무언가 부탁을 하며 나의 능력에 기댔고, 나는 매번 너그러이 NPC들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성인이 된 지금은 안다. 사실은 게임보다 뭐라도 괴롭지 않게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다. 학교도 집도 기약 없는 괴로움일 뿐이었다. 누구라도 맘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웃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게임에 그렇게까지 몰입했던 건 단지 그게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디아블로2 속의 거리처럼, 1999년과 2001년을 지나는 세기말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지금 잘 살고 있을까. 하나같이 어딘가 좀 삐딱하고 자주 허무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 대책 없이 약하고 본능적으로 상대의 상처를 눈치채는 사람들. 엉망진창인 사람들. 알고보면 다 착한 그 사람들.
그때 그 피씨방의 모두는 그저 체온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그래 물론 디아블로2도 재미있었지만.
그들 모두의 삶도 지금은 리마스터드 되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