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상천이다. 정말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김빠지게 일단 성부터 조졌다. 대한민국에서 김씨가 맡은 역할은 '보편적 구림'이다. 아무 이름에나 김 말고 다른 성을 붙여보면 한결 예뻐지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장동건이 김동건, 정우성이 김우성, 전지현이 김지현이 되면 즉각 15~20%쯤 매력이 감소하는 효과가 발동된다.
한자로는 金(김해 김) 相(서로 상) 千(일천 천)이다. 서로 상은 옛 관직의 재상을 뜻하는 한자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상에 천 번 오를 정도로 높은 사람이 돼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촌스러운 이름인가. 아들 봤다는 소식에 들뜬 외할아버지가 돈 주고 모셔온 이름이라 하는데, 나는 이제껏 내 이름 뜻보다 더 한심한 이름 뜻을 만나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 그 김상천이 관심 있는 건 높은 사람이 아니라 높은 마음이다. 권력 같이 알맹이 없는 걸 좇으며 살지 않고자 하는 나에게 내 이름은 짓궂은 장난과도 같다. 아니, 그리고 기왕 높은 사람 되라는 의미로 지을 거면 아예 킹왕짱 다 해먹으라고 지어야지, 킹왕짱은 되지 못하고 그의 사이드킥을 1천번 하라는 건 또 뭔가. 될 거면 유재석이 되는 게 낫지 박명수 1천번 돼봤자 쪼쪼댄스 1천번 추는 것밖에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김, 상, 천. 입 밖으로 불러보면, 참 기가 맥힌다. 김의 보편적 구림을 꾹 참고 도착하는 게 상의 시옷과 천의 된소리다. 시옷에 베이고 천에서 턱 막힌다. 이 이름이 싫은 결정적인 이유가 이거다.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날카롭고 묘하게 예민한 인상을 준다. 그마저도 다소 특이한 글자조합이라 전달이 잘 안 된다. 전화로 이름을 불러줄 때면 열에 일곱은 '천'이 아닌 '철'로 듣고, 나는 매번 "천원 할 때 천"이라고 정정해줘야 한다(이럴 거면 차라리 김상만이라고 하든가 만원이라도 되게).
내가 생각하는 예쁜 이름은 좀 더 부드러운 이름이다. 목적이 아니라 풍경이 담긴 이름이다. 숲, 바다, 계절, 색, 바람, 소리, 이런 세상의 근원이 담긴 이름은 다 세상과 잘 어울린다. 최가을, 문소리, 황보라, 혹은 윤슬 같은.
이것과 저것을 가르지 않고 감싸는 이름도 좋다. 글자조합만 보고선 남자일지 여자일지 구분할 수 없는 이세진 같은 이름이라거나. 이런 이름은 소리도 부드러워 누군가 부를 때 그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시작할 때부터 부드러운 배려를 이름에 담은 사람은 세상도 좀 더 부드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상천은 까딱 잘못하면 김블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회사에서 봄블링이란 앱을 만들었는데, 직원 4명의 좆소기업이라 마케팅할 돈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맨날 고민하다가, 정 안 되면 나랑 대표랑 이름을 김블링 이블링으로 개명하고 보도자료를 뿌려야지 생각했다. 와 진짜 이렇게까지 하는 애들이 있구나, 하고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돈이 별로 안 든다.
당시 빵을 먹으며 나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들은 대표는 먹던 빵에서 벌레가 반 마리만 나온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게 실제로 가능할지 확인하기 위해 개명 대행사에 전화를 걸어봤다. 통화 내용은 대략 이랬다.
"네, OOO 법무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개명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네네, 서류작성을 위해서 몇 가지 정보가 필요한데요. 우선 개명하시려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 그게... 이름이 좀 특이한데... 김... 블링... 이요."
"김블링... 이요?"
"네... 김블링... 한글로. 이런 이름도 가능할까요?"
"아... 네 가능...... 합니다. 다만... 음.. 이런 케이스... 음.. 이 이름으로 개명해서 살고자 하는 명확한 의지가 표출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경우 반려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지금 직장인이신가요?"
"네."
"그럼 일단 김블링 이름으로 명함부터 파세요. 그걸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또 실제로 김블링 이름으로 사회생활을 했다는 그런 게 다 나중에 증빙자료가 되는 거구요."
"아~ 명함~. 김블링 명함." "네네."
(중략)
다행히 봄블링은 35만 회원을 유치하고 작게나마 중국에도 진출하는 등 나름 잘 되어 나와 대표가 개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다행일까. 김상천과 김블링. 어쩌면 후자가 더 좋았을 수 있다. 김블링. 입에 착 붙지 않나. 블링블링 힙하고.
아휴 김상천은 진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