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chun Kim Mar 20. 2021

이름

내 이름은 김상천이다. 정말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김빠지게 일단 성부터 조졌다. 대한민국에서 김씨가 맡은 역할은 '보편적 구림'이다. 아무 이름에나 김 말고 다른 성을 붙여보면 한결 예뻐지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장동건이 김동건, 정우성이 김우성, 전지현이 김지현이 되면 즉각 15~20%쯤 매력이 감소하는 효과가 발동된다.


한자로는 金(김해 김) 相(서로 상) 千(일천 천)이다. 서로 상은 옛 관직의 재상을 뜻하는 한자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상에 천 번 오를 정도로 높은 사람이 돼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촌스러운 이름인가. 아들 봤다는 소식에 들뜬 외할아버지가 돈 주고 모셔온 이름이라 하는데, 나는 이제껏 내 이름 뜻보다 더 한심한 이름 뜻을 만나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 그 김상천이 관심 있는 건 높은 사람이 아니라 높은 마음이다. 권력 같이 알맹이 없는 걸 좇으며 살지 않고자 하는 나에게 내 이름은 짓궂은 장난과도 같다. 아니, 그리고 기왕 높은 사람 되라는 의미로 지을 거면 아예 킹왕짱 다 해먹으라고 지어야지, 킹왕짱은 되지 못하고 그의 사이드킥을 1천번 하라는 건 또 뭔가. 될 거면 유재석이 되는 게 낫지 박명수 1천번 돼봤자 쪼쪼댄스 1천번 추는 것밖에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김, 상, 천. 입 밖으로 불러보면, 참 기가 맥힌다. 김의 보편적 구림을 꾹 참고 도착하는 게 상의 시옷과 천의 된소리다. 시옷에 베이고 천에서 턱 막힌다. 이 이름이 싫은 결정적인 이유가 이거다.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날카롭고 묘하게 예민한 인상을 준다. 그마저도 다소 특이한 글자조합이라 전달이 잘 안 된다. 전화로 이름을 불러줄 때면 열에 일곱은 '천'이 아닌 '철'로 듣고, 나는 매번 "천원 할 때 천"이라고 정정해줘야 한다(이럴 거면 차라리 김상만이라고 하든가 만원이라도 되게).


내가 생각하는 예쁜 이름은 좀 더 부드러운 이름이다. 목적이 아니라 풍경이 담긴 이름이다. 숲, 바다, 계절, 색, 바람, 소리, 이런 세상의 근원이 담긴 이름은 다 세상과 잘 어울린다. 최가을, 문소리, 황보라, 혹은 윤슬 같은.


이것과 저것을 가르지 않고 감싸는 이름도 좋다. 글자조합만 보고선 남자일지 여자일지 구분할 수 없는 이세진 같은 이름이라거나. 이런 이름은 소리도 부드러워 누군가 부를 때 그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시작할 때부터 부드러운 배려를 이름에 담은 사람은 세상도 좀 더 부드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상천은 까딱 잘못하면 김블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회사에서 봄블링이란 앱을 만들었는데, 직원 4명의 좆소기업이라 마케팅할 돈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맨날 고민하다가, 정 안 되면 나랑 대표랑 이름을 김블링 이블링으로 개명하고 보도자료를 뿌려야지 생각했다. 와 진짜 이렇게까지 하는 애들이 있구나, 하고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돈이 별로 안 든다.


당시 빵을 먹으며 나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들은 대표는 먹던 빵에서 벌레가 반 마리만 나온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게 실제로 가능할지 확인하기 위해 개명 대행사에 전화를 걸어봤다. 통화 내용은 대략 이랬다.


"네, OOO 법무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개명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네네, 서류작성을 위해서 몇 가지 정보가 필요한데요. 우선 개명하시려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 그게... 이름이 좀 특이한데... 김... 블링... 이요."

"김블링... 이요?"

"네... 김블링... 한글로. 이런 이름도 가능할까요?"

"...  가능...... 합니다. 다만... .. 이런 케이스... ..  이름으로 개명해서 살고자 하는 명확한 의지가 표출되어야   같아요. 그렇지 않은 경우 반려될  있을  같은데요. 지금 직장인이신가요?"

"네."

"그럼 일단 김블링 이름으로 명함부터 파세요. 그걸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또 실제로 김블링 이름으로 사회생활을 했다는 그런 게 다 나중에 증빙자료가 되는 거구요."

"아~ 명함~. 김블링 명함." "네네."

(중략)


다행히 봄블링은 35만 회원을 유치하고 작게나마 중국에도 진출하는 등 나름 잘 되어 나와 대표가 개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다행일까. 김상천과 김블링. 어쩌면 후자가 더 좋았을 수 있다. 김블링. 입에 착 붙지 않나. 블링블링 힙하고.


아휴 김상천은 진짜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