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돈이 안 드는 것들이다. 영화 실컷 봐봐야 얼마 안 나간다. 귀 터지게 음악을 들어봐야 한 달 스트리밍비는 고작 6천원이다. 글 쓰는데 필요한 돈이라곤 커피값뿐이고 이 마저도 없어도 그만이다.
쇼핑은 좋아하지 않는다. 무언가 사기 위해 거쳐야 할 일련의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다. 그러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곤 5년간 옷을 한 벌도 안 사기도 했다. 출연자가 "이미 있는 옷으로도 평생 충분하다는 생각에 지난 20년간 옷을 사지 않았다"고 말한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 이미 옷 사는 걸 싫어하는데 명분까지 생긴 거다.
수집하는 것도 없다. 뭐든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는 성격이다. 지금 내가 가진 물건 중 그 어떤 것이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미련 없이 줄 수 있다.
아비투스 어쩌고 하는 어려운 말 없이도, 그냥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나는 늘 돈 안 쓰는 쪽으로 왔던 거구나. 어린 시절 음악이나 영화는 얼마든지 공짜로(죄송합니다) 누릴 수 있었으니까.
스니커즈 신고도 올라갈 수 있는 동네 뒷산들을 자주 올랐지만 사실 돈이 있었으면 나는 캠핑을 좋아했을 게 분명하다. 유튜브에서 캠핑 채널들을 보면서 그걸 알게 됐다.
어린 시절 기타를 배우고 싶다 느낀 것도 돌아보면 그때 내가 정말 기타를 배우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의식이 비싼 악기는 아예 선택지에서 배제한 게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콘트라베이스다. 그걸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니까 뭐든 낭비를 싫어하는 성격도, 미니멀리즘이란 말이 유행하기 10년도 전부터 이미 그렇게 살아온 삶의 방식도 결국 가계소득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나는 좋다. 형성된 가치관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에 만족한다. 다만 내가 펜싱을 배울 기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구나, 그걸 알게 됐다.
그런데 최근엔 좀 아프다. 이 '돈 안 드는 취미'로부터 역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게 나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약 두 달 전에 주식이란 걸 찔끔 경험해보고, 가상화폐 투자도 해보면서 재테크라는 세계를 알게 됐다. 그러자 보였다. 이 '돈 안 드는 취미'라는 건 사실은 값비싼 취미였다.
왓챠에 기록된 내 영화 평가 횟수는 1,755편이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3,268시간이다. 봤던 영화 또 보길 좋아하고 평가 안 한 영화도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 4,000시간은 영화를 본 것이다.
나와 달리 내 친구는 취미가 재테크다. 5년 전부터 재테크 스터디를 해왔고 평소에 정보들을 수집하며 조금씩 돈 불리는 재미를 알아갔다. 작년엔 주식을 했고 올해는 코인을 한다.
영화가 취미인 나는 4,000시간 동안 돈을 썼다. 물론 적게 썼다. 동일한 시간 동안 재테크가 취미인 내 친구는 돈을 벌었다. 많이 벌었다. 소득은 늘 내가 더 높았는데 비슷했던 자산규모는 이제 친구가 10배 이상 높다.
만약 나도 그 4,000시간 동안 주식을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코로나가 촉발시킨 양적완화와 그로 인한 나비효과들, 블록체인 및 스마트컨트랙트라는 기술혁신과 버블경제가 맞물려있는 가상화폐 시장. 영화 대신 그런 걸 4,000시간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근로소득이 나를 배신한 이 시대에 돈 안 드는 취미로부터 역습까지 맞아보니 제법 얼얼하다.
나의 사랑하는 영화들. 내가 이루고 싶은 글쓰기. 이것을 지속하기 위해선 이것들과 잠시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그렇게 생겨먹은 시대다. 그 사실이 억울하고 분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돈을 불리러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