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chun Kim Apr 30. 2022

128메가의 세계

태초에 MP3 물건이 있었다.  MP3 128MB짜리 샤프전자 제품이었다. 백이십팔메가. 중학교 2학년 나의 모든 세계가  안에 들어있었다.


락을 좋아한 중학생에게 중2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온 것이었고, 나는 그 누구보다 충실히 예언을 이행했다. 최애는 역시 라디오헤드였다. 128메가 안에 라디오헤드 노래 딱 세 곡을 넣고 한 달 내내 반복해서 들었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 아니 자면서도 이어폰을 꼽은 채였으니 그야말로 온종일 들었다. 수업시간엔 소매 안쪽에서 이어폰을 꺼내 한쪽 귀에 꼽고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척했다. 밥 먹을 때도 들었고 똥 쌀 때도 들었다. “이어폰 좀 빼”라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지만 이어폰을 꼽고 있어서 안 들리는 척했다.


그 MP3가격은 무려 18만5천원이었다. 정확한 가격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그 시절 의례 그랬던 것처럼 용팔당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강변 테크노마트 직원의 말이 ‘니가 어디까지 알아보고 왔는지 알려주면 그 선에서 최대한 널 벗겨먹어줄게’라는 뜻인 줄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답했다. 정신 차려보니 내 18만5천원이 없어져있었다. 집에 돌아와 용팔당했다는 걸 알았고(아니 실은 지하철에서부터 눈치챘지만 부정하고 있었다), “형이 5천원 빼준다”고 선심 쓰듯 말하던 용팔이가 가증스러웠다.


음. 이 순간 용팔이를 향한 오랜 분노를 내려놓기로 한다. 호구당하는 와중에도 호구당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제품 바꿔치기를 하진 않는지 체크한답시고 눈치보던 호구와트 수석장학생 같은 그때의 나도 용서하기로 한다. 이제사 보니 불가항력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전통 혹은 전자제품 구매자가 성장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현금 들고 테크노마트에 와서 MP3를 사려고 주뼛거리는 중학생이 용팔당하는 일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되어 온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그보다 나에게 MP3가 생겼다. 나에게, MP3가, 생겼다. 그 사실 말곤 중요한 게 없었다. 언제 어디서고 라디오헤드를 들을 수 있는, 128메가의 대용량(!)이면서도 초경량인 신제품 MP3가 지금 손에 들려있다. 중2병을 앓고 있는 자에게 그 사실은 마이크 타이슨에게 어퍼컷을 처맞은 수준의 충격과 같은 환희여서 용팔이에게 맞은 쨉 몇 대는 데미지도 못 느꼈다.


128메가면 앨범 하나는 너끈히 들어갈텐데 왜 세 곡이냐, 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건 중2병을 한참 모르는 소리. 당시의 나는 FLAC(Free Lossless Audio Codec) 파일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았다. 일반 오디오 파일은 사람이 못 듣는 주파수 영역의 소리를 삭제해 용량을 줄인 결과물이다. FLAC은 본래 음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압축한 무손실음원이다. 인간은 못 듣는 영역? 하, 그런 건 핑계가 되지 않는다. 감히 라디오헤드의 곡에 손을 대다니. 중2병에게 음원손실이란 헬창의 근손실과 같은 것이다. 중2병이란 인간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고르고 고른 그 세 곡은 <No Surprises> <High And Dry>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였다. 정말 질리도록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듣고 또 들어도 번번이 황홀해서 거의 오르가즘을 느꼈다. “팔세토와 비브라토를 넘나드는 톰 요크의 보컬” 같은 표현을 음악잡지에서 보고 언젠가 얘기해서 있어보이려고 외워두기도 했다.


그러나 써먹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중2병을 앓는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라디오헤드를 좋아한다고 내 입으로 얘기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누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물어보면 핑크 플로이드라고 말했다. 당시엔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 말했다. 실은 핑크플로이드를 모른다는 걸 들킬까봐 멤버와 곡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 모든 사람이 라디오헤드를 좋아했기에, 나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해버리고 나면 블러의 가사처럼 나도 수많은 0 중에 하나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128메가. 그 속에 내 세계가 통째로 담겨있었다. 어느 공간에 있던 나의 세계는 이어폰을 통해 연결된 MP3 안에 있었다. 달팽이관을 타고 내려가는 그 작은 세계 속에서 나는 수많은 0 중에 하나가 아닌 자족한 1이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너는 자라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우울한 표정의 브릿팝멸치가 되리라”는 예언을 이행한 대가로 병치레를 끝내고 나자 듣는 귀가 생기기 시작했다. 락 메탈 힙합 재즈 팝 일렉 가요 트롯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음악은 그냥 좋은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무수한 명곡들이 캄캄하고 헛헛한 나의 세계 속에 오색찬연한 이퀄라이저를 물결쳐주었다. 얼마 후 핑크 플로이드도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다.


18만5천원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단일 소비였다. 근데 그 효용가치를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도 가장 싸게 산 물건은 MP3였던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업반장, 동네꼬마 그리고 뮤지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