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MP3란 물건이 있었다. 내 MP3는 128MB짜리 샤프전자 제품이었다. 백이십팔메가. 중학교 2학년 나의 모든 세계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락을 좋아한 중학생에게 중2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온 것이었고, 나는 그 누구보다 충실히 예언을 이행했다. 최애는 역시 라디오헤드였다. 128메가 안에 라디오헤드 노래 딱 세 곡을 넣고 한 달 내내 반복해서 들었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 아니 자면서도 이어폰을 꼽은 채였으니 그야말로 온종일 들었다. 수업시간엔 소매 안쪽에서 이어폰을 꺼내 한쪽 귀에 꼽고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척했다. 밥 먹을 때도 들었고 똥 쌀 때도 들었다. “이어폰 좀 빼”라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지만 이어폰을 꼽고 있어서 안 들리는 척했다.
그 MP3가격은 무려 18만5천원이었다. 정확한 가격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그 시절 의례 그랬던 것처럼 용팔당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강변 테크노마트 직원의 말이 ‘니가 어디까지 알아보고 왔는지 알려주면 그 선에서 최대한 널 벗겨먹어줄게’라는 뜻인 줄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답했다. 정신 차려보니 내 18만5천원이 없어져있었다. 집에 돌아와 용팔당했다는 걸 알았고(아니 실은 지하철에서부터 눈치챘지만 부정하고 있었다), “형이 5천원 빼준다”고 선심 쓰듯 말하던 용팔이가 가증스러웠다.
음. 이 순간 용팔이를 향한 오랜 분노를 내려놓기로 한다. 호구당하는 와중에도 호구당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제품 바꿔치기를 하진 않는지 체크한답시고 눈치보던 호구와트 수석장학생 같은 그때의 나도 용서하기로 한다. 이제사 보니 불가항력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전통 혹은 전자제품 구매자가 성장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현금 들고 테크노마트에 와서 MP3를 사려고 주뼛거리는 중학생이 용팔당하는 일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되어 온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그보다 나에게 MP3가 생겼다. 나에게, MP3가, 생겼다. 그 사실 말곤 중요한 게 없었다. 언제 어디서고 라디오헤드를 들을 수 있는, 128메가의 대용량(!)이면서도 초경량인 신제품 MP3가 지금 손에 들려있다. 중2병을 앓고 있는 자에게 그 사실은 마이크 타이슨에게 어퍼컷을 처맞은 수준의 충격과 같은 환희여서 용팔이에게 맞은 쨉 몇 대는 데미지도 못 느꼈다.
128메가면 앨범 하나는 너끈히 들어갈텐데 왜 세 곡이냐, 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건 중2병을 한참 모르는 소리. 당시의 나는 FLAC(Free Lossless Audio Codec) 파일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았다. 일반 오디오 파일은 사람이 못 듣는 주파수 영역의 소리를 삭제해 용량을 줄인 결과물이다. FLAC은 본래 음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압축한 무손실음원이다. 인간은 못 듣는 영역? 하, 그런 건 핑계가 되지 않는다. 감히 라디오헤드의 곡에 손을 대다니. 중2병에게 음원손실이란 헬창의 근손실과 같은 것이다. 중2병이란 인간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고르고 고른 그 세 곡은 <No Surprises> <High And Dry>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였다. 정말 질리도록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듣고 또 들어도 번번이 황홀해서 거의 오르가즘을 느꼈다. “팔세토와 비브라토를 넘나드는 톰 요크의 보컬” 같은 표현을 음악잡지에서 보고 언젠가 얘기해서 있어보이려고 외워두기도 했다.
그러나 써먹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중2병을 앓는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라디오헤드를 좋아한다고 내 입으로 얘기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누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물어보면 핑크 플로이드라고 말했다. 당시엔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 말했다. 실은 핑크플로이드를 모른다는 걸 들킬까봐 멤버와 곡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 모든 사람이 라디오헤드를 좋아했기에, 나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해버리고 나면 블러의 가사처럼 나도 수많은 0 중에 하나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128메가. 그 속에 내 세계가 통째로 담겨있었다. 어느 공간에 있던 나의 세계는 이어폰을 통해 연결된 MP3 안에 있었다. 달팽이관을 타고 내려가는 그 작은 세계 속에서 나는 수많은 0 중에 하나가 아닌 자족한 1이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너는 자라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우울한 표정의 브릿팝멸치가 되리라”는 예언을 이행한 대가로 병치레를 끝내고 나자 듣는 귀가 생기기 시작했다. 락 메탈 힙합 재즈 팝 일렉 가요 트롯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음악은 그냥 좋은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무수한 명곡들이 캄캄하고 헛헛한 나의 세계 속에 오색찬연한 이퀄라이저를 물결쳐주었다. 얼마 후 핑크 플로이드도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다.
18만5천원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단일 소비였다. 근데 그 효용가치를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도 가장 싸게 산 물건은 MP3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