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 타탁. 장작 타는 소리를 듣자 금세 마음이 느슨해진다. 열십자 모양 나무심지가 꽂힌 작은 캔들일 뿐이다. 저 작은 불꽃으로도 인간은 안정감을 느낀다.
나무 타는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오래전부터 이어온 생존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불을 발견한 인간을 상상해본다. 그는 약한 존재였을 것이다. 어둠을 더듬어 거목의 밑동이나 좁은 동굴을 찾아 웅크린 채 밤이 지나길 바랐을 것이다. 해가 다시 뜰 때까지 살 수 있을까? 저 어둠으로부터 무언가 튀어나와 뒷목을 움켜쥐어도, 절명하는 순간에조차 그게 무언지 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불현듯 마른하늘이 꽈광 소리를 내리꽂는다. 거대한 포식자의 포효로 여긴 그는 숨을 죽이고 미동도 않는다. 한참이 지나고서 사지를 땅바닥에 바짝 붙인 채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나무가 번개를 맞아 불타고 있다. 크고 노란 꽃처럼 보인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가 나무 곁으로 간다. 그러자 어둠이 걷히고 그의 눈에 그의 손과 발이 보인다. 돌멩이를 쥔 손이 보일만큼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서 작은 아침이 온 것만 같다.
불은 생존의 실마리였다. 불은 미래였다. 피식자가 처음으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둠이 자신을 삼키려 들면 그는 불을 찾았다. 그의 자식들은 불을 피우고 지키는 법을 알아냈으므로 겨울을 살아낼 수 있었다. 그의 자식의 자식들은 고기를 익혀먹게 되면서 병들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나무를 타고 열매를 따며 턱을 우걱거리는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쓰지 않아도 힘을 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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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캔들 하나일 뿐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저 불꽃 하나에 저절로 마음이 안도할 순 없다. 작은 불꽃에도 안정감을 느끼는 건 우리 안에 불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풍경이나 공간에는 모두 그런 오래 이어온 생존의 기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물소리에 차분해지는 것. 인간에게 불이 미래였다면 물은 현재였을 것이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물의 발견은 곧 생명의 약속이었다. 시냇물 소리나 빗소리에 차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방에 식물이 있으면 보기에 좋고 마음도 좋아지는 것 역시 물의 기억 때문 아닐까. 초록은 깨끗한 물이 있다는 증명이다. 초록은 그 공간에 깨끗한 물을 머금고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켜준다. 공원에 가면 절로 마음이 좋아지는 것이나 비 냄새나는 숲에 가면 상쾌함을 느끼는 것은 본능적인 일이다. 초록은 물을 의미하고, 물을 찾으면 그때부터는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가질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