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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03. 2021

광주학생운동을 다룬 북한영화

북한영화 이야기 7. 정건조 연출, <광주는 부른다> (1985)

3.1 운동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던 1920년대 각 학교에서는 독서회 등이 조직되어 자체적인 학습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전문학교로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김태진이나 강호, 추민과 같은 카프 영화인들은 기존 해외 문학파들이 이끌던 전문학교의 연극부를 맡아 지도하면서 이들을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일원으로 키워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 지역에서는 좌익 극단들이 속출했고 1932년 카프 중앙에서는 극단 신건설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다툼이 민족 간 갈등으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제 경찰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의 편을 들면서 폭발했다. 광주 지역의 조선인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곧 전국적인 시위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데에는 이 문제를 조선인 여성에 대한 일본인 남성의 성폭력 문제로 인식했던 허정숙을 비롯한 조선의 여성운동가들의 노력도 있었다.  

    

학생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홍명희, 허헌 등 신간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도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을 가득 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 확대되어 연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12월 말 영화인들의 망년회가 아성키네마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좌익 영화인들이 신문사 영화담당 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영화배우 이원용은 셔츠를 찢어 구호를 적은 깃발을 만들었다. 이들 영화인들은 각자 대오를 지어 여러 신문사로 달려갔다.      


한밤중에 도심을 시끄럽게 만든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이 출동하여 10여 명의 영화인을 체포했다. 경찰서 유치장은 이미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학생들로 가득했다. 여기에 영화인들까지 합류를 하자 마치 그곳은 축제 분위기를 방불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일제 경찰은 5명을 골라 기소하고 나머지는 훈방조치하였다.

     

해방 후 처음 맞는 항일운동 기념행사는 1945년 11월 3일에 열린 광주학생운동 기념식이었다. 이후 이 날은 학생의 날이라는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1959년 광주 출신 영화제작자 이재명은 광주학생운동 30주년 기념으로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을 제작한다. 광주 시내의 각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광주학생운동을 기억하고 있던 광주시민들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영화가 완성되었다.      


<광주는 부른다>의 중국어 포스터


1985년 북한의 신필름에서도 광주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는 부른다>가 제작되었다. 신상옥이 이끌던 신필름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북한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야구경기 장면 등이 중요하게 묘사되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야구경기가 광주학생운동 4-5년 전 이야기임에도 마치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것처럼 묘사된 걸 보면 아마도 야구경기 장면을 그와 같이 활용한 1959년 작 <이름 없는 별들>을 참고하여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이 영화는 신상옥이 서방 세계로 탈출함으로써 신필름이 아닌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타이틀을 달고 보급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 북한에서는 항일투쟁을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언급하지 않았던 안중근-이준-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 작업은 김일성의 항일 유격투쟁이란, 어찌 보면 그들에게는 뻔할 수밖에 없는 내용과 다른 부분들을 보여줌으로써 북한의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재미를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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