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 이야기 6. 강홍식 연출, <내 고향>(1949)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를 꼽는다면 어떤 영화가 꼽힐까? 우선 가장 먼저 제작된 영화가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 당시 창작되었다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 역시 중요하게 이야기 될 것이다. 여기에 1970년대 이후 김일성우상화 작업과 관련한 김일성과 김일성의 일가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예술영화 <내 고향>은 북한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대서사시에 가까운 영화이다. 소작인으로 사는 관필이라는 청년이 지주의 횡포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 감옥에서 독립운동가를 만나 김일성부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옥을 탈출하여 유격대에 참여한다. 유격대원으로 여러 활동을 하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늙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난다. 그리고 건국 사업에 앞장선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북한 정권 수립 1주년을 앞두고 기획된, 북한정권의 수립과정을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을 중심으로 서술한 영화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의 최초의 예술영화가 1949년에 나왔으니 예술영화 제작에 4년이나 걸린 셈이다. 1942년 일제가 영화산업을 통제하면서 조선에 있던 모든 영화회사들의 허가를 취소하고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의 주도로 1개의 영화회사를 새로 만들었다. 그 영화제작회사는 당연히 서울에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해방 당시 평양에는 영화제작시설이나 자재, 기재, 인력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데 노력을 해야 했다. 극영화제작은 엄두 낼 수 없었다.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가 건설을 시작했다. 1948년 무렵 북한의 영화 수준은 극영화를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온다. 문제는 인력이었다.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영화연출가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배우 출신인 강홍식이 국립영화촬영소의 연출부장 직을 맡았다. 배우들은 1948년 무렵 월북한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내 고향>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강홍식은 원래 영화배우였다. 평양 출신인 그는 1917년 일본에 건너가 서양무용과 노래를 배워 아사쿠사 흥행가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닛카츠 소속의 영화배우로 활동했는데 심훈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이후 영화배우, 연극배우, 연극연출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30년대에는 레코드 가수로 활동했다. “봄이 왔네, 봄이 와~”로 시작하는 <처녀총각>과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로 시작하는 <유쾌한 시골영감> 등의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일제 말기까지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중 황해도 신천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북한에서 줄곧 활동했다.
<내 고향>은 북한 최초의 영화이다 보니 중요한 기념일마다 상영되는 영화였다. 그런데 처음 만들어지는 영화이다 보니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조선영화에 소련음악을 사용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 중간에 기록영화장면들이 들어갔는데, 그것도 시대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있는 장면들을 나중에 수정했다. 예를 들어 소련군에 의해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서술은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했다라는 식으로 바꾸었다. 우리가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1960년대 새롭게 녹음하고 일부 장면들을 수정한 영화이다.
강홍식은 1960년대 후반까지 북한의 원로 영화인으로 존경받으며 영화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김정일이 선전선동부 일을 맡게 되면서 부르주아적 습관이 몸에 뱄다는 이유로 숙청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다. 현재 강홍식은 북한영화계에서 복권되었다. 그의 아들 강효선도 북한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딸은 남한의 영화배우 강효실, 강효실의 아들은 영화배우 최민수이다. 그러니까 강홍식은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할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