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 이야기 5. 윤룡규 연출, <춘향전>(1958)
<춘향전>은 우리 영화 역사에서 가장 많이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국영화사를 보면 영화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춘향전>을 발견하게 된다. 최초의 고전작품, 최초의 토오키 영화, 전후 최고의 흥행작, 신상옥과 홍성기의 <춘향전> 경작, <춘향뎐>의 해외영화제 수상 등등.
북한에서도 <춘향전>은 마찬가지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해방 후 북한의 국립극단이나 국립민족예술극단에서 공연된 작품 중 관객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 <춘향전>이었다. 그러다보니 북한에서 처음으로 예술영화를 만들자고 했을 때 검토되었던 작품이었으며 총 세 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 사랑 내 사랑>(1985)도 포함된다.
북한 최초의 <춘향전>(1958)은 칼라영화 기술과 관련이 깊다. 1956년 북한 최초의 칼라 예술영화가 만들어지는데 그 작품이 최승희의 무용극 <사도성이야기>였다. 다음 해에 창극 <심청전>이 칼라영화로 만들어졌고, 이어서 조쏘합작영화 <형제>가, 그리고 1958년 <춘향전>이 칼라영화로 만들어진다. <춘향전>은 북한의 네 번째 칼라 예술영화였다.
소련과 합작으로 만든 <형제>를 제외하고, 북한에서 칼라영화로 만들어진 <사도성이야기>, <심청전>, <춘향전> 모두 시대물이다. 흑백영화와 칼라영화가 공존하던 시기에 시대물이 주로 칼라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새로운 영화기술이 도입되면 그 기술을 활용하여 영화를 만들게 된다. 칼라영화가 도입되었을 때 여러 나라에서는 시대물이나 역사물 같은, 의상과 세트의 색깔을 화려하게 표현하는데 유리한 영화를 주로 제작했다.
칼라영화 기술이 전 세계적으로 도입되던 이 무렵 사회주의 국가들은 인민성을 담보하는, 민족적 내용과 형식을 활용한 작품들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이런 영화들은 제작비가 많이 드는 반면 외국에 소개하기도 좋은 소재였다. 북한에서도 제작비가 많이 드는 <춘향전>을 칼라영화로 만들어 해외에 소개했다. 이 영화는 제1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하여 북한의 칼라기술 수준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춘향전>하면 당대의 청춘스타들이 춘향이와 이몽룡 역으로 출연하고 조역으로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등장하는 걸로 유명하다. 특히 <춘향전>의 히로인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맡았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서는 춘향 역으로 우인희, 이몽룡 역에는 신창규가 출연했다. 춘향 역의 우인희는 전후 북한 최고의 여배우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춘향전>은 월매나 변학도와 같은 조역들의 연기력이 중요한 흥행요소이다. 그래서 연기 잘하는 성격파 배우들이 그 역을 맡게 되는데, 북한의 <춘향전>에서 월매 역으로 김선영이, 변학도 역으로는 황철이 맡아 연기했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연극무대에서 춘향 역과 이몽룡 역을 맡은 적이 있었던 <춘향전>과 인연이 깊은 배우들이다.
1950년대 남한에서도 <춘향전>이 만들어져 북한의 <춘향전>과 경쟁했다. 북한의 칼라 <춘향전>이 나온 직후 남한에서는 독자적인 칼라기술을 개발하여 안종화 연출로 <춘향전>이 제작되었고, 1961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설날 흥행가에서 격돌하는 사건도 일어나게 된다. 당시 남한에서 신상옥, 홍성기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춘향전>은 칼라영화일 뿐만 아니라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된, 북한의 <춘향전>보다 더 스케일이 큰 영화였다.
1958년 제작된 <춘향전>에 출연했던 우인희가 1970년대 후반 숙청당하고 그 외 여러 배우들과 감독들도 숙청당하였기에 이 영화는 상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1958년에 <춘향전>을 연출했던 윤룡규 감독을 복귀시켜 유원준과 공동연출로 <춘향전>(1980)을 다시 만들게 한다. 당시 북한에 있었던 신상옥은 이 영화가 탐탁치 않았는지 윤룡규와 유원준의 춘향전을 뛰어넘는 신상옥의 <춘향전>을 선 보이게 된다. 이 영화가 바로 <사랑 사랑 내 사랑>이다. 이 영화는 북한의 <춘향전>에서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삭제된 “사랑가” 장면을 복원했다는 면에서 의의를 지닌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