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본인이 영화에 등장한 것은 북한 최초의 영화라는 <우리의 건설>(1946) 에서부터이다. 이 영화에서 김일성은 보통강 개수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삽을 들어 흙을 퍼내는 장면을 보여준다.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1949)에서도 김일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기념 경축대회가 열리는 김일성 광장의 연단에서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기록영화 필름 속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인물이었다.
<백두산이 보인다>의 한 장면
예술영화에서 배우가 김일성 역을 연기한 것은 1957년 작 <백두산이 보인다>가 그 처음이다. 이 영화는 한설야의 장편소설 『력사』를 각색한 것이다. 1950년대 북한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1960년 북한에서 제정한 인민상을 수상한 최초의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해방 후 북한 문단의 실력자이던 한설야는 1946년 항일 유격투쟁 전적지 답사단의 일원으로 만주지역을 둘러보던 중 김일성의 시난차 전투와 황니허즈 전투 이야기를 듣게 된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감동받은 그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가지고 장편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종군작가의 한 사람으로 전선을 둘러보던 한설야는 전선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김일성의 시난차, 황니허즈 전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기로 한다.
이렇게 시작된 한설야의 「력사」는 1953년 4월부터 8월까지 총 5회가 문예총 기관지인 『문학예술』에 연재되었다. 이중 첫 회분은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평화와 교육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북한에서는 연재가 마무리된 다음 해인 1954년 조선작가동맹출판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읽어야 할 필독서였다.
1956년 북한 영화계에서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하고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인 윤두헌에게 각색을 맡긴다. <소년 빨치산>(1951)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던 윤두헌은 이 영화를 아동 혁명단의 최호철을 중심으로 한 아동영화 형태로 각색했다.
연출은 소련에서 영화 유학을 마치고 온 김락섭이 맡았다. 촬영은 1950년 열린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기록영화상을 수상한 <친선의 노래>(1949)의 카메라맨 정규완이 맡았다. 여기에 북한 최고의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는데, 원작에 없던 호철이의 아버지, 어머니 역은 <내 고향>(1949)에서 연인으로 등장했던 유원준과 문예봉이 연기했으며 호철이를 이끌어주는 유격대원으로는 강홍식이 연기했다. 특히 주목되는 배역인 김일성 역으로는 배우 리단이 캐스팅되었다.
1918년생인 리단은 1940년 황철이 단장으로 있던 “아랑”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건너 간 그는 평양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된 직후 서울 시공관에서 서울시민위안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공연된 김태진 작 <리순신 장군>에서 이순신 장군 역을 맡았다. 이순신은 한국전쟁 중 불멸의 전략가이자 임진왜란을 승리를 이끈 역사적 인물로 칭송되고 있었다.
이순신 역을 시작으로 영웅적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한 리단은 이순신의 이미지를 <백두산이 보인다>의 김일성 역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더 나아가 1957년 평양의 국립극단에서 10월 혁명 40주년 기념공연으로 상연된 <크레믈린의 종소리>에서는 레닌 역을 맡아 영웅적 인물을 계속 연기했다.
<백두산이 보인다>는 김일성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영화이지만 북한의 영화 역사에서 지워진 영화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의 주인공은 아역인 최호철이기에 영화에서 김일성은 비중 있게 등장하지 않으며 탁월한 지략가로서의 면모 또한 부각되지 못했다. 여기에 전투를 너무 쉽게 이겨버리는 것, 유격대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영화 제작 초기부터 나오던 이러한 비판에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윤두헌이 종파분쟁기에 숙청당하였고, 1962년 원작자 한설야마저 숙청되면서 북한 영화사에서는 지워져 버린 영화가 되었다.